황류상(黃柳霜). 그녀의 미국 이름은 애나 메이 왕(Anna May Wong)입니다. 중국계3세인 그녀는 1905년 1월 3일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조부는 1853년 중국 광동성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금광이 있던 미시건 힐즈에서 가게 두 개를 운영한 상인이었습니다.
애나 왕은 어려서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극장에 가느라 학교도 빠지고 점심값으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극장가를 기웃대며 아홉 살 때 얻은 별명이 ‘CCC(Curious Chinese Child 호기심많은 중국아이)’였습니다. 열한 살 때부터 애나 메이 왕이라는 예명으로 단역을 맡기 시작했고 1921년엔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다니던 학교(LA하이스쿨)도 그만뒀습니다.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을 맡은 영화는 1922년 출연한 무성영화 ‘바다의 종(The Toll of Sea 사진)’이었습니다. 그녀의 연기력은 뉴욕타임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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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출연한 ‘바그다드의 도적’(1924년)을 통해 패션 아이콘이 되었고 국제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신선했지만 아시아계 여배우라는 현실이 늘 걸림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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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여성의 정형화(定型化)된 배역을 고집한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1928년 ‘크림슨 액트’를 끝으로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1934년 필름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할리우드를 떠난 이유에 대해 “내게 주어지는 역에 지쳤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중국인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할리우드는 중국인이 맡아야 할 역을 헝가리와 멕시코배우,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맡기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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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영국에서 제작한 그녀의 마지막 무성영화 ‘피카딜리’에서는 주연 질다 그레이를 능가하는 연기로 버라이어티지의 격찬을 받았습니다. 1930년대들어 할리우드는 신선한 이미지의 배우들을 수혈하기 위해 유럽으로 눈을 돌렸고 아이로니컬하게도 애나 왕이 제작자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녀는 유럽에서의 성공을 자신감으로 개선장군(凱旋將軍)처럼 돌아와 뉴욕 브로드웨이의 연극 ‘온더 스팟’에 섭니다. 이 작품은 후에 ‘알면 위험해’(1938년)로 영화화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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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또다른 브로드웨이 무대에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연출가가 일본 여성 역을 제안하자 거절하고 할리우드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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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딸’(1931년)은 그녀가 식상한 아시안 캐릭터를 맡은 마지막 영화입니다. 이듬해 ‘샹하이 익스프레스’에서 당대의 톱스타 마렌느 디트리히와 당당히 연기대결을 펼쳤고 섹슈얼한 매력을 발산해 성가(聲價)를 높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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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기간동안 활동이 저조했던 애나 왕은 1950년대 자신의 이름을 건 TV시리즈로 재기에 성공하며 아시아계 배우로 첫 TV시리즈의 기록도 세웠습니다.
1961년 2월 3일 56세의 나이로 타계(他界)한 왕은 탄생 100년을 맞은 2005년이후 그녀의 삶을 조명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거의 한세기전 할리우드와 유럽을 안방처럼 누비며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동양의 여배우가 있었다니 말입니다.
우리가 또 한가지 놀라야 할 일은 이 선구자적인 여배우의 일대기를 다름아닌 미국서 활약하는 한인 여류감독이 무려 8년의 발품을 팔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완성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보도를 통해 알렸졌다시피 그녀는 홍윤아 감독입니다.
애나 왕은 그녀가 거둔 위대한 업적에 어울리지 않게 오늘날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미국속의 아시안커뮤니티가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때문일 것입니다.
그녀의 존재가 오랜 세월 평가절하(平價切下) 된채 묻혀 있었지만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반세기만에 재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히 홍윤아 감독의 노력입니다. 홍 감독의 ‘애나 메이 왕: 그녀 자신의 이야기’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여 AFP가 대서특필하는 등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애나 메이 왕’은 내년 5월 아시안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미국의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될 예정입니다. 전국방송인 PBS에서 방송이 되면 그 파급효과는 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홍윤아 감독은 아직 어려움이 많습니다. 자금때문입니다. ‘애나 메이 왕’이 PBS에 방영되려면 이 영화에 사용한 여러 가지 필름자료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여러 도서관들과 개인에게 합당한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성격상 소송을 당할 위험성이 많기 때문에 보험도 들어야 합니다.
이런저런 비용들이 3만달러정도 되고 그중 1만달러는 홍 감독이 간신히 만들었지만 나머지 2만 달러는 해결방법이 막막했습니다. 궁여지책(궁여지책)으로 홍 감독은 ‘킥스타터(Kickstarter)’ 캠페인에 돌입했습니다. 킥스타터 캠페인은 인터넷 동영상을 통한 펀드레이징으로 일정기간 일정목표의 후원금액을 세운뒤 네티즌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돕고 싶은 사람들은 크레딧카드로 기부액을 약정하지만 모아진 돈이 목표액에 미달하면 모든 약정액이 취소되는 게임성격의 펀드레이징입니다. 11월 한달간 2만달러를 모으겠다고 킥스타터 캠페인을 시작, 18일 현재 모인 약정액은 1만2천여 달러입니다. 아직 8천달러가 모자릅니다. 기한내에 모일 것으로 기대하지만 만에 하나 미달할 경우 한푼도 건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만달러라는 돈은 많다면 많지만 5달러, 10달러라도 정성을 모은다면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는 액수입니다. 사실 2만 달러는 PBS 방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액수이고 미국내 극장에서 상연되거나 해외에서 개봉될 경우 그에 맞는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왕 킥스타터 캠페인을 시작했으니 가능한 많은 기금이 모이면 좋은 이유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다른 인터넷 공간으로 글을 퍼나르고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홍윤아 감독에게 조금만 힘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
홍 감독이 같은 한국인이라서 도와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애나 메이 왕은 단지 한명의 중국출신 여배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할리우드에서 아시안배우들이 단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역할이 주어져도 쿵푸 등 무술의 달인, 혹은 안경쓰고 공부만 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나 주어지는 현실에서 일찍이 90년전 애나 메이 왕이라는 가녀린 동양여인이 아시안 배우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치열하게 벌인 사실을 재조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대중의 현실기호에 무엇보다 잘 반응하는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배우가 능력에 걸맞는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궁국적으로 아시안커뮤니티가 보이지 않는 유리천정을 뚫고 미주류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품에 대한 참여와 관심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홍감독의 킥스타터 캠페인에 참여하려면 아래 링크된 주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kickstarter.com/projects/1107767469/get-anna-may-wong-on-public-tv
* 킥스타터 캠페인은 5달러부터 15달러 20달러 25달러 30달러 등 다양한 액수의 약정을 할 수 있습니다. 약정액에 따라 흥미진진한 선물들이 있습니다. 몇가지 소개하면요.^^
5달러(웹사이트 기증자수록) 15달러(홍윤아감독의 감사메일) 20달러(영화포스트카드 땡큐카드) 25달러(1930년대 애나메이왕의 편지 사본) 30달러(오리지날 CD증정)...50달러(영화 DVD) 60달러(샹하이익스프레스 티셔츠)...1천달러(홍윤아 감독과 스카이프 대화+친필서명포스터+티셔츠)..2천달러(홍윤아감독과 점심식사+영화DVD+티셔츠+자필서명 포스터-뉴욕권에 한함)..5천달러(기증자가 사는 곳에서 홍윤아 감독이 직접 특별시사회+선물 일체-미국내에 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