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까지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단연 축구였습니다. 축구대표팀 경기를 하면 ‘국기(國技)’라는 표현이 당연하게 나왔습니다.
축구는 일제시대부터 민족적인 자부심을 일깨우는 스포츠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속에서도 축구만큼은 일본을 압도했고 해방후에도 그런 구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을 비교하면 처지가 조금 다릅니다. 한국은 올림픽 첫 출전에서 세계 수준과의 높은 벽을 실감한후 수십년간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하는 등 이렇다할 인연을 맺지 못한 반면 일본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동메달의 깜짝 쾌거를 일궜기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팬들은 한국축구에 기를 펴지 못하던 일본이 어떻게 그런 성적을 냈는지 의아해 하실줄 압니다. 사실 일본은 그 무렵 가마모토라는 불세출의 센터포워드가 활약하던 시절이라 한국과 대등한 전력을 갖고 있던 팀이었습니다.
당시 올림픽 예선에서 한국은 필리핀(5-0) 월남(3-0) 대만(4-2)을 연파하고 일본과 3-3으로 비겼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이 일본에 15-0으로 대패하면서 골득실에서 뒤져 본선티켓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올림픽에서 일약 동메달까지 따냈으니 얼마나 속이 끓었겠습니까.
본선에서 일본은 조예선 첫 상대인 나이지리아를 3-1로 꺾고 강호 브라질과 1-1, 스페인과 0-0으로 비겨 8강전에 올랐습니다. (당시 본선 진출팀은 16개국이었기 때문에 예선리그를 통과하면 8강이었습니다.)
8강 상대는 프랑스였는데 3-1로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킵니다. 준결승에서 당시 최강 헝가리에게 5-0으로 대패했지만 3, 4위전에서 주최국 맥시코를 2-0으로 누르고 당당 동메달의 기적을 일궜지요.
한국축구로선 부럽기만한 결실이었습니다. 사실 한국은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했지만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기까지는 정말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물론 코리아 타이틀을 달고 첫 출전한 48 런던올림픽에서 축구가 8강 진출을 일구긴 했지만 당시는 대륙예선전이 없었고 참가국도 적어서 본선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격파하면서 8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틀후 스웨덴과의 8강전에서 무려 12-0으로 참패(慘敗)하고 말았지요.
▲ 이상 사진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그러나 당시 올림픽 출전이 신생독립국으로서 최악의 조건을 딛고 참가했다는 점에서 가볍게 평가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 단장이었던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의 말입니다.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그리고 또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경기장에 가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행로를 보면 더웠다, 추웠다, 그리고 따뜻했다, 선선했다, 하는 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우리 선수들이 이러한 악조건을 능히 극복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들의 승리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우리 선수단이 서울을 떠나 런던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20일이 걸렸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기차와 배, 비행기 등 모든 교통수단을 망라하여 지구촌 주요도시를 두루 거치는 여정이었는데요 경유지가 부산- 후쿠오카-요코하마-상해-홍콩-방콕-캘커타-봄베이-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이었다니 정말 상상이 안갑니다.
한국 축구는 56년 멜버른 올림픽 예선에서 일본과 동률을 기록했지만 추첨 끝에 본선티켓을 놓쳤고 60년 로마 올림픽 예선에선 대만과 경쟁하다 몰수게임패를 당해 본선진출이 좌절됐습니다.
1964년 동경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체코에 6-1, 브라질에 4-0, 아랍연방에는 무려 10-0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지요. 그로부터 무려 24년간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습니다. 월드컵의 경우 1954년 스위스대회이후 32년간 분루(憤淚)를 삼키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풀이를 한 것과 비슷했습니다.
어렸을 때 축구를 가장 좋아했던 저는 2년주기로 돌아오는 월드컵과 올림픽 예선에서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탈락하는 것이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최종예선전에 올라가면 ‘유럽축구’를 구사하는 호주나 이스라엘의 벽에 부딛쳐 좌절되곤 했지요.
지금도 기억속에 아련하게 남은 것은 72년 뮌헨올림픽 최종예선이었습니다. 그때는 한수 아래인 말레이시아만 이기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던 황금찬스였습니다. 더구나 경기장소는 우리 안방이었습니다.
71년 9월 25일이었지요. 전 국민의 염원속에 경기가 열린 그날 서울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엔 이례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일방적으로 우리가 몰아붙였고 말레이시아는 밀집수비로 대항했습니다. 그러나 그라운드 잔디를 삼킨 폭우로 볼은 거의 콘트롤이 되지 않아 한국은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골을 터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날 퍼부은 슈팅은 31개, 코너킥은 무려 20개였지만 골문을 통과한 건 단 한 개도 없었지요.
후반 막판 말레이시아는 기습공격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날 거의 유일한 슈팅이 한국의 골문을 갈랐고 올림픽 본선진출의 여망은 폭우속에 가라앉았지요. 그날 이후 말레이시아는 수중전 축구에 강한 팀으로 각인되었고 실제로 우중경기만 펼치면 한국이 고전했습니다.(말레이시아가 주최한 메르데카배에서 한국이 말레이시아와 경기할때면 경기직전 소방차 몇 대를 동원해 운동장에 물을 뿌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러다 본선진출의 한을 푼 것이 개최국으로 자동진출한 88서울올림픽이었습니다. 이후 한국은 7회 연속 올림픽 진출의 개가를 올렸지만 이번엔 예선리그를 통과하는게 문제였습니다. 올림픽 축구에 나이제한이 도입되면서 월드컵보다는 한결 손쉬운 경쟁이었지만 이상할정도로 한국축구는 예선리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92년 바르셀로나에선 무패행진(3무)을 하고도 탈락했고 96년 애틀랜타에선 1승1무1패를 했지만 탈락했습니다. 심지어 2000년 시드니에선 2승1패를 마크하고도 골득실에서 밀려 떨어졌으니 오지게 운도 없었습니다.
조별 예선을 첫 통과한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었습니다. 그러나 4강 문턱에서 파라과이에 3-2로 패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 이하 사진 런던올림픽 홈페이지
이번 런던올림픽에서도 한국은 일단 16강 진출을 목표했고 잘하면 8강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조2위로 통과한 후 주최국 영국을 만나 거의 승산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지요.
설사 우리보다 약한 상대라 하더라도 주최국이면 홈그라운드의 잇점이란게 있습니다. 하물며 상대는 우승을 노리는 영국, 그것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통합팀 아닙니까.
아다시피 월드컵은 이들 나라들이 독자적으로 나가지만 올림픽만큼은 대영제국(Great Britain)으로 출전하기 때문에 통합영국팀이 출전합니다. 전력이 그만큼 세다는 뜻입니다.
7만5천관중이 일방적으로 영국을 응원하고 이날 두 개의 페널티킥에서 확인했듯 심판진도 비우호적인 상황에서 한국의 승리를 내다본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표팀은 깜짝놀랄 투혼을 발휘하며 전반에는 영국을 압도하는 등 끝까지 밀리지 않았습니다. 당초 한국쯤은 안중(眼中)에도 없어하던 오만방자한 영국을 그들의 안방에서 격침시킨 것입니다.
저는 이번 승리를 올림픽 우승에 버금가는 쾌거로 평가합니다. 이번 대회에서 사실상 최강국은 주최국 영국이었습니다. 선수 대부분이 세계최고의 리그로 평가받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영국통합팀을 상대로 축구가 만들 수 있는 최장의 드라마를 연출한 끝에 승리한 것은 금메달만큼 값진 것입니다.
올림픽 첫 4강 신화를 영국을 상대로 일궜다는 사실이 이 글을 쓰게 했습니다. TV 화면을 통해 부둥켜안고 감격해하는 선수들을 보는 동안 뇌리에는 반세기의 잔혹한 올림픽 도전사들이 스쳐갔습니다.
우리의 대견한 올림픽전사들이 기왕이면 4강전에서 브라질을 물리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멕시코-일본 승자를 제물로 반드시 금빛 메달을 일궈 한국 축구의 새로운 역시를 다시 쓰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