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기원이 바로 을사년(乙巳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는 60년만에 돌아오므로 단기이래로 70개가 넘는 을사년이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 뼛골깊이 새겨진 것은 바로 1905년 을사년입니다.
이 해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강제로 맺어진 조약이므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해입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것은 1910년 경술(庚戌)년이지만 실상 을사년에 대한제국은 일제의 꼭두각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일제는 조선을 ‘보호국가’로 만들기 위해 주변강대국들에 대한 사전정지 작업을 벌였습니다. 1905년 7월 27일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묵인을 얻어냈고 영국과는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또 9월 5일에는 러시아의 양해를 받아냈습니다.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고 제국주의열강들끼리 “나는 이걸 먹을테니 너는 이걸 먹어라”며 더러운 밥그릇을 챙긴 것이지요.
정훈현의 <친일파는 살아있다>에 따르면 그해 11월 9일 일왕(日王)은 추밀원장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 고종 황제에게 친서를 보냅니다. 그 내용이 가관입니다.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에 따라 조처하소서..”
▲ 이등박문 www.en.wikipedia.org
대한제국 황제에게 짐짓 예의를 가진 척, 실상은 ‘잔말말고 일본 대사가 시키는대로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민 일본의 조약안은 전문(前文)과 5개항이었는데, 전문은 ‘일한(日韓)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외교권을 박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망해갈지언정 쭉정이 나라가 되어 왜국의 애견노릇을 어찌 하겠습니까. 어전회의를 할 것도 없이 일본이 내민 조약안을 대신들은 반대합니다.
시일이 경과해도 말을 듣지 않자 17일 임권조(林權助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는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내 얼르고 달래며 승인을 꾀했고 이들을 궁중으로 보내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습니다. 이날 궁궐 주위와 시내 요소에 무장한 일본군들을 배치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어전회의는 일본측 제안을 거부하기로 합의합니다.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이등박문이 다시 나섭니다.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일본군사령관을 불러 그와 함께 세 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한 후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하게 해결을 보도록 압박합니다. 이날 고종이 불참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지만 다시 여기서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합니다.
일본군사령관을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속에 궁궐에 나타난 이등은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반을 묻습니다.
한편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대신은 참정(총리)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공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8인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약체결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한규설과 민영기였으며, 다른 대신들도 우회적으로 반대하거나 찬성한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한 이는 없었습니다. 이등의 강압에 못이긴 일부가 나중에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였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8일 뒤인 26일 윤병수(尹秉綬)가 올린 상소에는 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는데, 이등이 각 대신들에게 조약체결 찬반 여부를 묻고 결론을 내리는 ‘엿장수 맘대로’의 장면이 가관입니다.
“각 대신들 의견을 물었더니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실지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참정대신(한규설)과 탁지부대신(민영기)뿐입니다. 주무대신에게 지시를 내려 빨리 조인하기 바랍니다.”
이날 밤 이등은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조약문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이튿날인 18일 덕수궁 내 수옥헌(현 중명전)에서 한국정부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특명 전권공사 임권조(林權助 하야시 곤스케)간에 ‘을사보호조약’이 정식 체결됐습니다.
- 제1조 : 일본국 정부는 동경의 외무성을 통해 금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독 지휘할 것이고, 일본국 외교 대표와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및 그 이익을 보호할 것이다.
- 제2조 :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책임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격을 띤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
- 제3조 : 일본 정부는 한국 황제 폐하 아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면서 한국 황제 폐하를 만나볼 권리를 가진다.
- 제4조 :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간에 현존하고 있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한다.
- 제5조 :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을사늑약은 외교권 포기와 통감부설치의 내용을 담고 있어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대내적으로 감독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어 주권국가의 본질을 기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는 의미를 갖는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에 서명한 대신은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필두로,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공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5인으로, 조국을 왜적에게 팔아먹은 매국노(賣國奴)라하여 오늘날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장지연은 11월 20일자에 저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을사늑약의 굴욕적인 내용을 폭로하고, 일본의 흉계를 통렬히 공박하며 그 사실을 전 국민에게 알렸습니다.
“이토(伊藤博文)가 한국에 왔을 때,……천만 뜻밖에 5조약이 제출되었다.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분열을 빚어낼 것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등박문의 본의는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자는 각자의 영리만을 생각하고, 위협에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어, 4,000년 역사의 강토와 500년 종사를 타인에게 바치고, 2000만의 영혼을 모두 타인의 노예로 되게 하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각 대신은 족히 엄하게 문책할 가치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이라는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며 이름만 팔려고 꾀하였다.”
장지연은 을사오적은 말할 것도 없고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 등도 통렬하게 공박하며 전 국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습니다. 그에 반해 황성신문의 경쟁지였던 제국신문은 을사늑약을 놓고 “한때 분함을 참으면 100년 화근을 면함이라” 하면서 후일의 자주력을 기르고, 국민이 자중할 것을 역설하는 논조를 펼쳤고 대한신문은 ‘경거망동’이라고 폄하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더니 나라 팔아먹은 대신들이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며 희롱하는 언론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문득 오늘날 제국신문의 후예와 아류라 함직한 언론들이 뇌리를 스칩니다.
‘오늘 하루 목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의 논설로 인해 황성신문은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였다고 해서 3개월간 정간되었고, 장지연은 일본 관헌에 붙잡혀서 90여 일간 투옥의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에 민영환, 조병세 등이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고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벌어졌으며, 전국적인 의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조약 체결 5년 뒤인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 을사오적은 일제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와 함께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이들 가운데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에게 피습돼 고통을 겪었을 뿐 나머지 4인은 부귀와 천수를 누렸으며, 사후에는 후손에게 작위와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길었던 한세기전의 을사늑약 얘기를 하게 된 이유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부르기도 싫은 이명박 정부가 임기말년 초대형사고를 칠 기세입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라는 비밀협약체결을 강행하려다 국회와 여론의 반대에 부딛쳐 일단 연기한 일 말입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한마디로 한미군사동맹을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일본과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이 협정을 맺게되면 우리 안보는 일본군사력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제 나라 영토만 지키라고 제한적으로 인정해준 일본의 자위대가 유사시 한반도에 파병(派兵)되고 주한미군을 대신하여 주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어쩐지 역사의 시계를 한세기전으로 돌리고 있다는 기분이 안드시는지요.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한일군사협정이 현실화될 경우 한·미·일-북·중·러 군사동맹 구도가 되어 동북아가 ‘신냉전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의 간접대결구도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은 다시한번 한반도를 구한말 열강들의 각축장(角逐場)으로 만드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군사협정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민족분단의 최대 원흉은 군국주의 일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일본은 멀쩡한 우리의 땅인 독도를 불법점유했다고 분쟁지역화하고 제국주의 일본의 잔학한 희생양인 20만명의 정신대여성들을 창녀라는 벼락맞을 망언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일본과 안보 협정을 하자구요? 오소리가 겁난다고 이리와 손잡자는건가요? 우리의 안보를 일본의 자위대에 맡기다니요?
어쩌면 이렇게 한세기전 상황과 흡사할까요. 대한제국의 외교능력이 없으니 대일본제국에게 맡기자고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과 이명박정부의 내각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이완용도 처음엔 몇 번이나 반대를 했다는데 MB정부는 국민도 모르게 밀어붙이려 했으니 을사오적을 쩜쩌먹는 역적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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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독도문제를 놓고 MB가 일본수상한테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 기다려달라'고 해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후 '지곤조기(지금은 곤란하다 조금 기다려달라)'라는 웃지못할 유행어도 퍼졌는데요. 논란을 촉발한 요미우리신문에 법적 책임을 묻는다던 청와대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일본왕을 만났을 때 깍듯이 고개숙이던 MB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일본과의 과거사에 관대하고 유독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니 출생지가 일본 오사카라는 사실이 구설을 빚는게 아닐까요.
한일군사협정 연기 압박에 대해 정부 고위관계자가 “이제와서 서명하지 않으면 국제적인 개망신”이라고 했다는군요. 망신이 무서워 자위대를 불러들인다구? 글쎄 개망신은 당신들이지 국민이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