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은 비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다. 년은 부엌에서 밥을 짓다 놈을 바라본다. 년과 눈이 마주치자 놈은 사랑스런 미소를 짓는다. 풍성한 가을걷이 속에 년과 놈의 행복이 익어간다……"
아주 오래 전 대학 시절의 에피소드다. 교수님이 "우리 말에는 영어의 'He'나 'She'와 같은 마땅한 3인칭 대명사가 없다"면서 '년'과 '놈'을 활용한 순 우리말 3인칭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다.
교수님의 낭송에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와 ‘그녀’를 사용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글이 발칙한 욕설의 잡문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본래 우리말에는 '그'와 '그녀'라는 호칭이 없었다. 20세기 초엽 영미문학이 번역 소개되면서 'He'와 'She'를 대신할 적당한 말이 없어 번역자들을 난감하게 했다. 특히 'She'에 '궐녀'(厥女) 혹은 '피녀'(彼女)라는 어려운 한자어가 동원되기도 했다.
이른바 '년놈론'은 1920년대 중반 국문학, 한문학, 영문학에 달통한 양주동 선생의 파격적인 제안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년'과 '놈'은 본래 비속어가 아니라는 게 선생의 논리였다. 하긴 한자어인 '者'의 새김(訓)은 '놈 자'이니 틀린 얘기도 아니다. 그러나 새김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를 ‘그 놈'으로 둔갑해 사용하면 멱살잡이라도 날 일이다.
양주동 선생의 제안은 한바탕 소극(笑劇)으로 끝났고 김동인 선생이 시도한 '그'와 '그녀'가 대세를 장악, 논쟁은 끝이 났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라는 이상한 말이다. 남자를 가리키는 인칭대명사인 '그'와 달리 관형사 '그'와 한자어 '女'의 어색한 결합은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
'그자'처럼 '그녀'도 한자어로는 탈이 없다가 ‘그 계집’으로 풀어쓰면 우리말을 깔보는듯 하여 마음이 불편하다. 근대국어 이전까지 '놈'이나 '계집'은 의미의 가치평가에서 중립적이던 단어들이었지만 현대국어에서는 가치평가가 낮은 단어들로 변한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 대신 '그니', '그미'라고 한 문학가들도 있었고 '년'과 '놈'을 밀어붙인 몇몇 양 박사의 후예들도 있었다.
얼마 전 한 신문이 사설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박씨'라고 호칭해 지지자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씨'(氏)라는 한자어도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해 부르는 말임은 분명한데 '박근혜씨'라고 하면 하대하는 것 같고 '박씨'라고 부르면 아예 인격 모독으로 들리니 '씨'를 함부로 들먹여선 안될 일이다.
알다시피 '미스터' '미스'는 '씨'와 동급임에도 영어에서의 위치는 우리네 '씨'가 감히 견주지 못할 만큼 높은 위상을 자랑한다. 미국서 살다 보면, 이런저런 단속을 하면서도 극존칭인 '써'(Sir)와 '맴'(Ma’am)으로 불러주는 경찰도 만나지만 어쨌거나 '미스' '미스터'는 '선생님' 급의 품격으로 대접해주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미국 신문을 보며 새삼 놀란 것은 대부분의 신문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미스, 미스터를 생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의 기사에서 이름만 부르는 것은 우리의 관행이라 치고 엽기적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에게도 꼬박꼬박 존칭을 붙여주는 것을 보면 공연히 부아가 치밀 정도이다.
물론 우리도 사건보도에서 '씨'를 붙이긴 하지만 두 번째 언급할 때부터는 '김씨' '이씨' '박씨' 등으로 약칭해 존칭의 저항감을 해소하고 그나마 피의자에서 확정 판결이 난 '천인공노할 범인'에게 '씨'를 붙이는 일은 없게 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우리 말은 호칭을 통해 상하의 구별을 하고 감정과 정서를 부여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언론 보도에서 호칭에 따른 불협화음을 줄이려면 약칭어보다는 이름 전체에 '씨'를 붙이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영어에서야 성과 이름이 긴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 이름은 절대 다수가 달랑 세 자인데 특별히 불편할 것도 없을 테니까.
성씨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처음 미국에 와서 한인 부부들을 취재할 때 대부분 성이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알고 보니 부인들의 진짜 성은 따로 있었고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미국식 관행을 따른 것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국 관습에 익숙해지고 상대 여성을 호칭할 때 남편 성만 알아도 쉽게 부를 수 있는 장점도 있으니 피차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아내를 '미세스 노'라고 부르면 낯설기보다는 묘한 행복감이 든다. 이름만큼이나 가깝고 살가워진 느낌 때문일까?
* 위 글은 2009년 10월 뉴시스통신에 ‘미스박 박씨 박선생님’이라는 제목으로 띄운 특파원칼럼입니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를 지칭해 ‘그년’이라는 막말을 해서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의 공천헌금 파문과 관련, 이 의원이 트위터에 ‘공천헌금이 아니라 공천장사입니다...그들의 주인은 박근혜 의원인데 그년 서슬이 퍼래서 사과도 하지 않고 얼렁뚱땅..’이라고 올린 것입니다.
▲ 이종걸 의원 홈페이지
이것이 문제가 되자 이 의원은 “그것이 나의 진심”이었다, “단순 오타”였다, “그년이나 그녀나 같은 말”이었다, “그보다 더 세게 했어야 했다는 사람들도 많다”, “더이상 사과따위 필요없다”..이리저리 말을 돌리다 뒤늦게 “유감...” 표명을 했습니다.
전 이종걸 의원을 잘 모릅니다. 기사 검색을 하니 대대로 내려온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일제합병이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자 대한민국초대부통령을 지내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부통령 자리를 내던진 이시영 선생의 종손자라고 하니 자랑할만한 집안의 후손이로군요.
그러나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대중에게 퍼뜨린 이번 막말은 자신의 집안을 욕되게 했을뿐아니라 공천헌금 파문으로 핀치에 몰린 새누리당에 역공의 기회를 제공한 한심한 행태였습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사태를 바로 수습하지 않고 빙빙 돌려가며 여론의 눈치를 보다 일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지자 사과의 제스처를 했다는 것입니다. 실컷 판을 키워 적을 도왔으니 이적질이 아닌가요.
진중권 교수가 이번 일을 '김용민막말' 파문에 빗대 국회의원 제명감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김용민은 오래전 B급 방송에서 지껄이기나 했지, 명문가문의 후손이자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공당의 유력후보를 ‘그년’이라 한 것은 개인의 명예훼손을 넘어 평소 여성에 대한 그의 시각을 말해준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참 ‘그 者들’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