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1월26일 뉴욕타임스는 덴버 발로 한 증기여객선의 진수(進水) 소식을 전했습니다. 12월10일 샌프란시스코로 첫 출항을 앞둔 시베리아호에 관한 뉴스였습니다.
기사 내용엔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코리아(Korea)' 입니다. 코리아는 시베리아호에 앞서 그해 8월30일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한 역사적인 여객선의 이름이었습니다.
1800년대 이후 많은 영어권 매체엔 코리아 이름을 딴 배들의 소식이 실렸습니다. 최초의 코리아는 미국의 포경선 Corea 호였고 영국에도 Corea 호가 있었지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국가명 표기가 Corea에서 Korea로 바뀌었듯 선박명 역시 Korea 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선박이 바로 1902년 퍼시픽메일증기선사가 진수한 SS Korea 호입니다.
당시 총액 397만5114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코리아호는 당시 태평양 정기여객선으로 세계 최대이자 최신형이었습니다. 마닐라와 홍콩을 경유해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도착할 때 부두엔 무려 2천여명의 구경꾼이 나오는 등 코리아호는 화제의 여객선이었지요.
1등석 승객만 300명을 태우고 20노트의 속도를 자랑하는 코리아호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총 10일15시간15분이 소요됐고 이는 당시 세계신기록이었습니다. 코리아호는 그로부터 5년뒤인 1905년 10월 10일10시간28분으로 자기 기록을 갈아치웁니다.
당시 태평양을 오가는 5대 증기여객선으로 코리아호와 만추리아, 몽골리아, 시베리아, 차이나호가 있었지만 코리아호의 기록은 1937년까지 신기록으로 남을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1915년 웨스트버지니아의 애틀랜틱 운송회사에 매각된 코리아호는 파나마운하를 건너 버지니아 노포크를 경유, 런던으로 출항(出航)하는 신노선에 투입됐습니다. 그해 12월6일 마젤란 해협을 건넌 코리아호는 영국해협에서 프린세스 소피아호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Korea의 기구한 운명때문이었을까요. 하필 코리아호는 1934년 일본 요코하마의 선사 도요기센사이샤에 매각되고 맙니다. 이름도 '코리아 마루' 호가 되었구요. 일제에 합병된 후 창씨개명을 강요당한 대한제국의 백성들처럼 코리아호도 일본식 이름을 달게 된 것입니다. ㅠㅠ
흥미로운 것은 Korea가 표기된 최초의 신문은 미국 신문이 아니라 싱가포르의 영자신문이라는 사실입니다. 1847년 11월14일 '더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앤 머컨타일 애드바이저'는 '코리아의 해안(the coast of Korea)'에서 석달전 발생한 수수께끼같은 좌초(坐礁) 사건을 보도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168년전 佛함대 군산앞바다에서 좌초한 사연
1847년 8월10일 군산 앞바다 고군도에 프랑스 함대 두척이 좌초했습니다. 라피에르 제독이 지휘하는 전함 라 글롸흐 호 등 두 척의 전투함엔 560여명의 프랑스 해군 병사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베라크루즈 전투에서 사령선 역할을 한 프랑스의 막강 전투함 라 글롸흐 호 등 두척의 해군함정이 왜 서해안에 다가왔고 맥없이 표류(漂流)하는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라피에르 제독은 고군도 모래톱에 간신히 배를 대고 두 대의 보트를 긴급히 중국 상해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대덜루스 호와 에스피글 호, 칠더스 호가 지원에 나섰고 9월12일 제독과 프랑스 군인들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세간에서는 프랑스 신부들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일련의 사태에 보복하기 위해 왔다가 풍랑을 만나 좌초된 것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사실 프랑스는 1839년 기해교난때 학살된 프랑스 선교사 3명에 대한 책임을 묻고 조선과 통상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척의 함정이 한적한 서해안 연안에 몰래 와서 무력시위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훗날 밝혀졌지만 프랑스 함대 탑승자 중엔 한명의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조선의 두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 신부였지요.
싱가포르 프리프레스의 기사를 보겠습니다.
"8월15일 라피에르 장군의 편지에 따르면 라 글롸흐호 등 두척의 프랑스 전함이 8월10일 코리아 해안가에서 좌초됐다. 높은 파도에 밀려 해안 가까이 왔다가 썰물이 빠지면서 모래톱에 빠진 것이다. 다친 사람은 없으며 모두 배에서 빠져나왔다. 현지인들을 상대로 식량을 사기 위해 교섭했지만 관리들로부터 허락을 받지 못했다. 사령관은 상해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두척의 보트를 급파했다.."
신문은 차이나메일 9월28일 기사를 인용해 영국의 구조함이 고군도에 도착했을 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대덜러스 호 등 세척의 영국 함정이 도착했을 때 좌초된 프랑스 전함의 장교와 사병들은 해안가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한국인들이 제공한 구호물품이 아주 많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보상을 거절했다. 선원들은 영국배 세척에 나눠탔고 사령관과 300명의 선원들을 태운 대덜러스호는 일요일 상해에 도착했다.."
이어 신문은 프랑스 전함이 한국에 간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라피에르 제독은 한국에 고의로 갔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정보가 정확하다면 한국인들이 작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을 죽인 것에 대한 조사를 하고 해명을 요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迫害) 과정에서 프랑스 신부들이 많이 희생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에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殉敎)한 후 교황 레오12세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조선의 선교를 맡겼기때문입니다.
프랑스 신부들과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 천주교 신자들은 발각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황해도와 전라북도 쪽의 해로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도 서해 해로를 통한 입국로 개척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고 1845년 황해도 해안을 탐사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했습니다.
라 글롸흐 호를 타고 조선에 몰래 들어올 계획이었던 최양업 신부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고군도에서 신분을 감춘 채 프랑스 함대와 조선인들의 통역을 돕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1948년과 1949년에도 입국을 시도하는 등 5전6기의 노력 끝에 조선에 들어간 최신부는 12년에 걸친 사목활동을 하다 선종(善終)했습니다.
1876년 2월13일 뉴욕타임스는 '코리아 엿보기(A GLIMPSE OF THE KOREA)'라는 제목으로 영국 함정이 전남의 한 섬에 상륙해 조선인들의 생활을 관찰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서쪽 섬과 동쪽 섬엔 각각 2개의 마을에 250가구가 살고 있다. 처음 우리가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의 빛을 보였으나 아침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만쪽에 정박한 배를 구경했다. 마을 대표로 보이는 사람은 검은색의 헤드기어(갓)를 썼는데 사우스웨일즈의 농촌여성이 쓰는 것과 비슷했다. 보통 사람들의 옷은 하얗고 길었으며 일본 기모노처럼 허리를 묶었다. 헐렁하고 넓은 바지에 흰양말(버선)을 신었다. 머리는 길렀는데 위로 묶어서 매듭(상투)을 지었다. 체류하는 동안 대화는 중국인 하인을 통해 필담으로 나눴다. 8시가 됐을 때 해군관습에 따라 '신이여 여왕폐하를 구하소서(God save the Queen)가 연주되자 사람들이 모두 나와 구경했다. 나이먹은 촌장은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다. 마을에서 담은 술을 가져와서 넓적하게 생긴 금속의 잔에 담아 한국인들의 관습대로 먼저 마시고 잔을 방문자들에게 건넸다, 술(막걸리)은 흰색이었고 신 맛이 났다. 방문자들에겐 썩 내키지 않는 맛이었다. 여자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 어디론가 숨은게 분명했다. 집은 나무로 지어졌고 낮은 발코니(툇마루)가 있었고 미닫이 문과 창문은 일본과 비슷하다. 방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은 돼지와 개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