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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뉴욕 편지
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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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도 가고 청춘도 가고 上

김영삼을 생각한다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5-12-07 (월) 11:49:05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내 젊은 시절을 다루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든 분들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 시절을 다루기엔 자료화면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재현하기엔 너무나 많이 달라지고 오래되어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요즘 방영되는 응답하라 1988’이 저의 푸릇한 청춘과 근접하여 반가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타이틀 곡인 산울림 김창완의 청춘이 애닯게 귓전을 맴도네요..

 

신문사에 막 입사하고 넉달여만에 열린게 서울 올림픽이었지요. 만일 저만의 응답하라 시리즈를 만든다면 언제가 좋을까 상상의 나래를 편적이 있습니다. 시기로 따지면 1980년 전후가 되야 할 것 같습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정말이지 역사의 엄청난 격변기였으니까요. 그 기억속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는 한사람 YS입니다. 김영삼이라는 이름 석자보다 영어이니셜 두자가 더 익숙했던 사람. 영원한 라이벌 DJ와 권부의 외로운 2인자 JP와 함께 3김으로 불리던 제 부모님 연배였지만 그들의 정쟁과 투쟁, 민주화의 진통이 한세대 아래 우리의 가슴과 함께 불탔기때문이지요.

 

 

1987김영삼 노태우 - Copy.jpg

 

96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티켓이 걸린 대회였던가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이 결승에서 만났습니다. 결승골을 넣은 최용수의 수훈에 힘입어 2-1로 승리했지요. 숙적 일본을 꺾고 이긴 승리라 국민들의 기쁨이 참 컸던 기억이 납니다.

 

경기 직후 TV앞에서 승리의 여운에 들떠 있을 때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최용수에게 격려전화하는 것이 생중계로 연결되었습니다.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그시절만 해도 중요한 스포츠이벤트에서 개가를 올리면 대통령이 전화로 수훈갑(殊勳甲)을 격려하는 장면이 TV를 타곤 했지요.

 

우리의 YS대통령 최용수에게 축하를 하며 "최용수선수 거 코너킥 잘 찼어요!" 하셨겠지요.

 

최용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방송보던 시청자들, "엥?..-_-;;"

 

페널티킥을 넣었는데 코너킥이라니? 70년 브라질 플라멩고 팀 선수처럼 바나나킥이라도 넣었던가?

 

YS의 헛다리 유머는 인터넷상에서 회자(膾炙)되지만 ... 글쎄요..여러 일화들이 맞다면 그럴법한데 다만 일반상식이 부족한 탓 아니겠냐..이런 생각을 합니다. 백과사전처럼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게 뭐 큰 허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하는데 꼭 머리가 비상하고 유식할 필요가 있나요..

 

YS에 대해선 뭐랄까요. 순전히 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고 할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박정희키드'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오직 이땅의 대통령은 그분 홀로였으니까요.

 

1961년 군사쿠데타후 2년간 대통령 권한대행, 민정이양한다 해놓고 구정치인들 손발 묶어놓고 대통령 되고 다시 67년에 재선에 성공했지요. 언젠가 선거하는날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투표하러 가시는 부모님에게 박정희대통령 뽑아야 돼~”한것을요.

 

아마 세뇌(?)겠지요. ‘박정희가 안되면 이북에서 김일성이 쳐들어올거라고..우리나라는 오직 그분이 지킬수 있다..ㅎㅎ 꼭 찍어야 돼 박정희대통령!” 젖비린내 나는 어린 것이 신신당부하는걸 보고 오묘한 미소를 짓던 부모님이 떠오르네요.

 

박정희는 야당의 윤보선을 116여만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2년후 3선금지를 개헌으로 풀고 1971년 또다시 대선에 나가지요. 당시 야당 후보 김대중은 저처럼 어린 것들에게 어떤 이미지였냐 하면 거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예비군제도 없애자는 얘기로 빨갱이로 몰았던 기억이 납니다. 정작 해방 직후 좌익 활동을 한 것은 박정희였는데 말이죠.

 

그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훗날 김대중이 당시 장충공원 유세에서 "만일 이번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總統)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정희는 95만표 차이로 승리했지만 야당에서는 군부대 등의 대규모 부정투표 행위와 조직적인 부정선거로 100만표 이상을 챙겼다고 공격했지요. 사실 김대중은 서울은 물론, 부산에서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습니다.

 

이듬해 서슬 퍼런 10월유신이 공표됐습니다. 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의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3분의1에 대한 임명권 등이 부여됐고 이제 6년임기의 대통령은 국민의 손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꼭두각시들이 체육관에서 뽑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때 YS의 일화가 한가지 있습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연구소의 초청으로 방미 도중 박정희의 유신선포 소식을 들었습니다. 돌아가면 탄압이 예상되는만큼 동행한 부인을 비롯해 현지의 라이샤워, 코헨 교수 등의 만류도 뿌리치고 귀국한 것입니다. 김포공항에는 대기하던 청년들이 있었고 한동안 연금상태에 있었다가 풀려났습니다. 그전까지 하루 6갑이나 피우던 담배와 폭음하던 술을 이 무렵 끊었다고 합니다. 연금이 풀리고 난 뒤에도 YS는 한동안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왜 마스크를 하냐는 질문에 "우리나라 정치는 갔다. 이런 판에 어떻게 국민들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니냐"며 죄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1972년5월21일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jpg
1972년 김영삼과 박정희 <정부사진기록집>

 

공교롭게 10월유신이 선포된 1011DJ도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중이었습니다. 미국서 서둘러 돌아온 YS와 달리 DJ는 측근인 송원영의 설득으로 미국 망명을 결심합니다.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한 DJ는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으로 넘어가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반 유신 투쟁을 벌였습니다.

 

김대중납치사건은 이듬해 710일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한 뒤 벌어진 일입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88일 납치된 DJ는 알려진대로 현해탄 수장(水葬)의 위기를 모면한 후 엿새만에 동교동 자택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가택연금에 들어갔습니다. 일본으로선 자국땅에서 납치사건이 벌어지는 '개무시'를 당한 셈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김종필이 진사사절로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는 후문입니다. 이래저래 국격이 참 많이 떨어진 시절이었습니다.

 

어쨌든 10월유신은 정권교체를 못하면 이 나라에 영구독재의 총통시대가 올 것이라고 호소한 김대중의 예언이 적중한 셈입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학교를 파하고 친구들과 함께 북한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데..우리나라 전쟁날지도 몰라"하고 가슴 서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공포감을 심어주는 선전을 해가며 박정희의 독재를 합리화 했지요. 1974815일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저격으로 육영수여사가 피격 사망했습니다.

 

그날은 한국최초의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는 날이기도 했지요. 종로에서 노량진까지 지하철을 탔는데 나중에 엄청난 사건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TV에서 문세광의 첫 번째 총소리가 나는 순간 기념사를 읽던 박정희는 연단 연설대 아래 바로 몸을 숨겼고 그오른쪽 뒤편에 꼿꼿이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황급히 권총을 꺼내들고 황급히 뛰어나오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재일동포라는 문세광이 어떻게 일본 파출소에서 총을 훔쳐서 한국에 왔고 대통령 행사장에서 여성의 핸드백까지 검사하던 경호실이 신분도 불확실한 문세광이 행사장에 들어와서 총을 쏠 수 있었는지는 그야말로 총체적 미스테리입니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일은 박종규의 응사로 그야말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피해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객석에 앉아 있던 한 여고생, 이날 합창을 위해 참석했다고 하지요. 그 어린 여고생이 문세광의 총도 아닌 경호실장의 총을 맞고 숨진 것입니다. 훗날 대한사격협회장도 역임하고 군출신으로 필경 명사수였을 경호실장이 엉뚱한 사람에게 총을 쏜 것입니다. 총한번 쏴본적도 없는 문세광이 달려가면서 연설대도 맞추는 정확성(?)을 보였는데 명색이 경호실장이 무고한 민간인을 쏘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고생의 억울한 죽음은 육여사의 비극에 묻혀 전혀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여고생에 대해, 또 그 가족의 후일담을 다룬 언론도 들어보지 못했구요.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1975817일 장준하선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도 박정희 정권입니다. 등산을 갔는데 홀로 실족사했다구요? 수십년간 의문사로 처리된 이 사건은 최근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타살임이 밝혀졌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범인이 잡힌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어차피 정권의 하수인에 불과하니까요.

 

잘 알려진대로 장준하선생인 일제강점기인 20대 중반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서 탈출해 중국광야를 걸어서 광복군에 가담하였습니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였고, 박정희는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쓰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만주군 중위로 독립군을 토벌(討伐)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이 생전에 박정희를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준 일도 있다고 하지요. 박정희는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봤을 것이라는 점은 불보듯 훤합니다.

 

다른 내용들이 기록 등 자료에 의존한 것이었다면 1979년의 일들은 기억속에 선명합니다. 모든 것은 YH사건으로 시작됐지요.

 

그해 89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 명이 회사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마포 신민당사 4층강당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811일 새벽 2시 이른바 ‘101호작전을 개시, 경찰 1천여 명이 신민당사에 난입, 농성노동자 172명을 강제해산시키고 신민당 의원과 취재기자들을 무차별 폭행했습니다. 야만적인 구타속에 YH여공 김경숙씨가 추락, 사망하고 1백여 명이 부상당하는 폭거(暴擧)를 자행했지요.

 

이후 민주화운동세력이 대대적인 반유신투쟁에 나섰고 이는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박정희독재를 혐오하는 모든 민주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정희정권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부채질 했습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타임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 발언을 문제삼아 104일 의원직에서 제명하는 어이없는 망동을 저질렀습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김영삼은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공화당에서는 김영삼의 발언이 외세를 등에 업고 사회분란과 내란을 조장하려는 음모라며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저 유명한 어록도 이 무렵 나온 것입니다.

 

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한 의원직 제명이 이어지자 신민당등 야당 의원들이 동조 사표를 제출했고 이에 대한 선별수리 방침이 알려지자 마침내 부산 마산의 민심이 폭발했습니다. 10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민주선언문을 배포하고, 16일에는 인근 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세해 대규모 독재타도와 반정부시위가 시작됐습니다. 18일부터 마산 창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다.

 

운명의 1026일 삽교호 방조제 준공식을 다녀온 박정희는 경호실장 차지절 중정부장 김재규 비서실장 김계원과 함께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만찬을 가졌지요.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 신모씨가 접대원으로 자리했습니다.

 

김영삼의 박정희 몰락 예언은 3주만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TV에서 문공부장관 김성진이 나와 "각하께서 서거하셨다"며 울먹이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네요. 박정희키드에게는 영원한 대통령인줄 알았던 박정희가 다름아닌 심복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박정권으로부터 지독한 핍박을 받았음에도 김영삼은 청와대에 마련된 박정희 빈소를 찾아가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그가 찾아가지 않는다고 전혀 문제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야당인사들은 물론 심지어 종교인들도 빈소방문을 반대도 하였구요. 그러나 YS는 윤모 목사에게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라며 빈소를 찾아갔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에 YS는 민주주의 회복을 바라는 국민들의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DJ78년부터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지만 호남출신이라는 점, 그를 쫒아다니던 사상 문제가 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YS20대때 모친이 무장공비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적인 비극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고 싶어하는 세력으로부터 보호막이 되었고 거제출신으로 대구출신인 박정희와 같은 영남권이어서 지역감정 조장에서도 자유로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YS가 이땅에 민주화를 가져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jpg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시 YS와 DJ

 

짧았던 서울의 봄이 전두환의 신군부 군화발에 짓밟힌 후에도 민주주의를 소생시킨 주역은 다름아닌 김영삼입니다. 5.17이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대중은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감형을 받고 198212월 전두환이 레이건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는 거래를 통해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풀려나게 되었지요. 납치사건이후 투옥과 가택연금을 되풀이하던 DJ2차 미국망명길에 오른 것입니다.

 

때문에 군부독재의 탄압속에 이땅에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오로지 YS의 몫이 되었습니다. DJ의 오랜 시련과 투쟁에 대해선 경의를 표하지만 저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땅의 민주화를 여는데 YS가 상대적으로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9835월 무렵 신문을 보면 정체불명의 수수께끼같은 단어들이 등장했습니다. '재야인사' '시국현안' '식사문제'..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내용들이 신문기사로 나오는 겁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김영삼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은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사면후 미국으로 보내졌고 김영삼은 1년여간 상도동 자택에서 가택연금을 당한후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YS는 민주산악회라는 동호인 모임을 만들어 민주 인사들과 산행을 하며 주요 시국 사건에 대해 입장 발표를 하는 등 사실상의 정치활동을 벌였습니다. 1983518일 광주 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전두환 정권에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였습니다.

 

그의 단식을 국민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군부의 언론통제 때문입니다. 군부의 검열을 받는 국내 언론은 그저 현안 문제또는 재야인사 문제등 애매한 제목의 일단기사로 취급하고 있었지요.

 

군사정권의 언론통제로 재야인사문제’ ‘현안문제이런 식의 모호한 단어로 기사를 썼던 것이지요. 단식 일주일만에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서울대학교 병원에 사실상 강제입원 조치를 하였고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이 세차례나 찾아와 단식 중단을 해달라는 전두환의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YS의 황소 고집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필경 미국행도 회유(懷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시체로 외국에 보낼 수는 있을 것"이라는 말로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야당 지도자가 자칫 단식으로 절명하기라도 하면 온 나라에 폭동이 날지도 모른다고 겁먹은 결국 전두환정권은 상당부분 정치억압을 풀겠다는 약속을 하고 YS23일간의 단식을 풀었지요.

 

이후 미국의 DJ측 인사들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선명야당 신한민주당이 창당, 이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불러 올 수 있는 서막을 열게 되었지요.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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