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리 고분군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현재 행정구역명은 웅진동)에 위치한 고분들로 백제의 왕릉들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현재 7호 분까지 복원이 되어 있는데 이중 7호분은 무령왕릉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공주시에서 서북방으로 약 1㎞ 정도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상에 올라보면 동으로 풍광이 우수한 계룡산이 보이고
서남으로는 금강이 휘감고 돌아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고분은 벽돌무덤(塼築墳)인 무령왕릉과 6호분이 있고,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인 1~5호분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1~5호분의 돌방무덤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방무덤들이 이미 1927년에 조사된 바 있다고 합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현재 백제시기의 고분 7기가 전시되고 있는데 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이 포함되어 있고,
1985년부터는 무령왕릉의 모형전시관도 마련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1927년에서 1932년 사이에 조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조사는 본격적인 학술조사라기보다는 외형 및
내부의 구조파악과 유물의 수습에 불과한 것이어서 고분들의 유형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만이 전해졌습니다.
이외에도 송산리 일대에는 미확인된 고분이 아직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신라의 왕릉과 달리 백제의 왕릉은
아담하고 소박합니다. 현재는 왕릉의 훼손을 막기 위해 모형전시관을 세워 일반 관광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무령왕(武寧王 462-523)의 동성왕(東城王)의 둘째아들이라는 설과 배다른 형이라는 두가지 이설(異說)이
존재합니다.
1971년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따르면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합니다.
다음 여정으로 찾아간 곳은 김천의 명찰 직지사입니다. 직지사는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해발 1111m의 황악산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조성돼 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는 무려 1600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로 신라 초기 눌지왕 때 신라에 불법의
가르침을 전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황악산의 깊은 계곡을 가리키며 거대한 사찰이 자리 잡을 곳이라 예언한데서 유래합니다. 이설로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유래도 있습니다.
아무튼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라 하여 직지(直旨)라는 명칭을 지녔다니 적잖이 흥미롭습니다. 과연 직지사는 아도화상의
영험한 예언대로 동국 제일의 가람이라는 칭송을 받는 사찰이 되었습니다. 천 년 묵은 칡나무와 싸리나무로 한 기둥씩 만들었다는 일주문을 지나
나타나는 사찰의 경내는 약 10헥타르에 이를만큼 광대합니다.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당시 일주문을 제외하고 모두 전소되었습니다. 때문에 삼국시대의 본래 모습은 찾기 힘들지만 그후로
여러차례의 중창불사로 화려함과 은근한 전통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대웅전 삼존불의 뒤에 걸린 삼존불탱화와 약사전의 석조약불좌상 등 수많은 보물과 성보박물관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천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은 가장 많은 대중들의 눈길을 받습니다.
천불상들은 현세의 고통을 신도들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한다는 수많은 부처님으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이라 더욱
신비롭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한 분 한 분의 부처님을 살펴보는 특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다. 천분의 부처님 중 단 한 분은 부처님의
탄생을 상징하는 탄생불이라고 하는군요.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장경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직지사는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었습니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들어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저 유명한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이곳에서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됐습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실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는군요.
<4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