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모국 방문중 숭례문(崇禮門)이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어이없이 소실된지 5년 3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찾아가보았지요. 많은 시민들이 개방된
숭례문을 감회어린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복원은 되었지만 입맛은 썼습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했다한들 돌기반을 제외한 본래의 숭례문은 이미 화염속에 사라졌으니까요.
600년이 넘는 역사가 영원히 소실(燒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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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참화(慘禍)속에서도 무사했던 숭례문이 칠십 노인 방화범에 의해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실로 어이없습니다. 하필
우리 세대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먼 후세의 사람들은 이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참으로 한심한 선조라고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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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제게 어색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불린 남대문(南大門)이 익숙했기때문입니다. 일부에선 남대문이
일제가 격하하기 위해 부른 이름이기 때문에 숭례문이라고 해야 한다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숭례문을 만들 때부터 남대문으로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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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시피 남대문은 조선조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정문으로 4대문의 하나입니다. 보물1호인 동(東)대문(大門)과
서대문(西大門), 북(北)대문(大門)이 있는데 각각의 문들은 별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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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은 현재 이름만 남아있고 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1915년 일제가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철거했기때문입니다.
일제가 저지른 죄악은 이처럼 무수히 많다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바로 북대문입니다. 북대문은 현재도 존재합니다. 어디냐구요? 종로구 삼청동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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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은 북문으로도 불리는데 비교적 험준한 북악산에 위치해 성문의 기능을 사실상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68년
1.21사태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습니다.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으로,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가 쓴 것이라고 하네요.
제 집 안방에 거는 족자도 아니고 서예가도 아닌 사람이 자기 글씨를 나라의 도성문에 다는 짓은 왜하는지...
아래 그림에서 보듯 조선의 수도 한양은 완벽하게 성곽(城郭) 형태였고 4대문만이 아니라 모두 8대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료 두산백과 참조>
서대문은 1396년(태조 5년) 한양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습니다.
1413년(태종 13)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년)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했습니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년)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519년의
역사가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 일제가 남대문 성벽을 훼손하기 전후 모습 www.ko.wikipedia.org
어린 시절부터 늘상 보던 남대문은 솔직히 애처로웠습니다. 차라리 국보1호의 영예를 주지나말지 명색이 국보1호를 지정하고
주변에 고층건물을 쳐올려 고목나무 매미신세를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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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전소되는 미증유의 사태에 해외에 있는 재외국민으로서 통탄스럽고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요. 정말이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석고대죄(席藁待罪)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방화의 원인제공을 한 것은 이명박이었습니다. 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숭례문 개방을
공약했습니다. 문화재청의 부정적 의견을 무시하고 공사를 해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도록
하였지요. 이러한 숭례문 개방 사업이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중요 치적(治積)으로 선전되었습니다.
청계천도 인공하천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만들었으니 복원이 아니라 망쳤다고 비판을 받다시피 한반도대운하에 4대강사업으로 온
국토를 ‘시멘트 공구리’로 망가뜨린 MB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남대문을 어설프게 시민에 개방하지 않았다면 칠십노인이 쉽게 불을 지를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경비시스템도 한심했습니다.
2005년부터는 삼성 에스원에게 유료로 맡겨오다가, 예산절감을 이유로 2008년 1월 문화재 지킴이 캠페인으로 무료경비를 자처한 무선용역경비업체
KT텔레캅측이 맡아 경비인원과 경비재 및 경비횟수가 대폭 감소했습니다. 주간에는 근무자가 지켰지만 화재감지기와 경보설비도 없었고 밤에는
무인경비였으니 정신나간 방화범이 맘놓고 불을 지른게지요. 남대문은 언제든 공격받을수 있는 허점 투성이였고 사실상의 무방비상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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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의 화재 발생이후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의 한심한 대처도 전소(全燒)의 비극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 화재 신고후
소방차들이 출동했을때만 해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초기 진압이 가능했지만 국보1호라는 특수성 때문에 과감한 화재 진압을 하지
않는바람에 화마를 키운 것입니다.
또한 진화에 필수적인 실측 도면이 화재 발생 2시간 후에야 소방당국에 전달된 것으로 드러난 것도 효과적인 진압에 실패한
빌미가 되었구요. 아무튼 이런 총체적인 문제속에 국보1호가 5시간만에 전소되는 참극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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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이야기입니다만 남대문의 문화재 보험금이 9500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어이가 없습니다. 국보1호의 보험금이
서민의 집 한 채값밖에 안된다니요.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고 이명박은 뻔번하게도 남대문의 복원을 국민성금으로 하자고 떠들어 욕을
벌어들였습니다.
그나마 복원이 졸속으로 처리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복원에 쓸 수 있는 대형 금강 소나무의 확보도 쉽지 않지만
이를 안전히 사용하기 위해 건조하는 데만도 3년이 넘기때문에, 전문가들은 최소기한을 5년으로 봤던 것입니다.
당시 여론은 절대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철저한 고증작업을 통해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신응수(대목장), 이재순·이의상(석장), 홍창원(단청장) 한형준(제와장), 이근복(번와장), 신인영(대장장) 등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대거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남대문은 복원과정에서 일제가 없앤 양 날개의 성벽(동쪽 53m, 서쪽 16m)을 달아주고 원래보다 약 1.5m 정도
올라와 있는 지표를 원상으로 회복시켰습니다. 단청은 조선 중후기 색조에서 조선 전기 색조로 복원했고 안료도 화학안료가 아니라 전통안료를
사용했습니다. 중앙 통로인 홍예 천장의 용 그림도 고증(考證)을 거쳐 새로 그렸구요.
문루로 올라가는 동쪽의 계단 폭은 2.9m에서 5m로 넓어졌고, 용마루도 15.7m에서 16.6m로 조금 길어졌으며 1층
마루도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변경했습니다. 지붕의 기와는 공장제품이 아니라 전통기법으로 일일이 구워낸 것입니다.
기와는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전남 장흥에서 전통기법으로 구웠고, 기와잇기는 이근복 번와장 등이 나서 모두
2만3300여장을 입혔습니다. 화강암은 경기 포천에서, 깔돌인 박석은 강화도 매음리에서 구했습니다. 못 등 각종 철물도 공사현장에 지은
대장간에서 직접 만든 것입니다.
문화재청은 가능한 한 원래 부재를 사용한다는 원칙 아래 문루 1층에 사용된 목재 90% 이상을 기존 부재로 활용했고,
2층도 중심기둥(고주)을 살리기 위해 기존 고주에 새 나무를 이어 붙였습니다. 과거의 참사를 잊지 않도록 불에 그을린 흔적 등은 일부러 그대로
보이게 했다는군요.
전통방식 성곽의 돌 하나를 다듬는데만 사흘이 걸렸다고 하니 복원을 위한 정성은 인정할만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남대문을 무엄하게도 내려다보는 삼성본관 등 주변의 위압적인 건물들이 철거되어 고유의 웅장한 자태가
살아나길 소망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정한 남대문의 복원이라 할 수 없으며 ‘국보1호’라는 명예(名譽) 또한 위선(僞善)의 헌사(獻辭)가
될테니까요.
<에필로그>
숭례문 뒤에 대형 캔버스를 설치하고 이를 촬영하려던 한 사진작가의 퍼포먼스가 캔버스가
무너지는 바람에 실패한 사고가 17일 발생했습니다.
이명호 작가는 이날 새벽 2시부터 크레인 3대를 동원해 숭례문 뒤에 가로 45미터,
세로 18미터짜리 초대형 캔버스를 설치하려 했지만, 오전 6시 45분쯤 캔버스를 지탱하는 지지대 한쪽이 무너져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크레인이 숭례문 주변 도로에서 작업을 했고, 캔버스도 숭례문에서 일정 거리 떨어져
있어 다행히 숭례문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 사고로 울타리 일부가 휘어지고 숭례문 감시 초소 한쪽이
긁혔습니다.
문화재청은 안전 문제를 이유로 오전 7시반쯤 퍼포먼스 불허 방침을 통보했습니다. 이
작가는 이 작가는 “예행연습도 성공했고 사전에 구조 검토도 받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며 “화재로 손실됐던 숭례문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아쉬움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국보 1호를 소재로 퍼포먼스를 하겠다는 발상에 문화재청이 허가를 해
줬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위했습니다.
<3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