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통일기러기'가 되었나
이른 아침 '김일성광장' 앞에서
기자로서 북녘 방문은 오랜 목표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기자생활 초기에 방북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 취재단의 일원이었던 난 축구를 맡고 있었다.
그때 북경에서 역사적인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전격 합의되어 아시안게임 취재단중 각 사별로 한명씩 축구대표팀과 함께 북한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신문의 유일한 축구기자로 현장에 있었으니 평양서 열리는 통일축구대회도 가는게 마땅했다. 하지만 고작 3년차의 ‘신병’에게 역사적인 첫 방북 취재의 영광을 줄리 만무했다. 축구팀장을 했던 고참선배가 가는 모습을 부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평양에서 통일축구가 한차례 더 있었지만 역시나 서열(序列)에 밀려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1999년에 통일농구대회가 평양에서 열렸을때 나는 5명의 농구기자들을 이끄는 팀장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번에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국에 의해 소수의 ‘풀 기자’만 동행하도록 허락됐기 때문이다.
한국서 15년 미국서 15년, 그럭저럭 30여년 기자생활을 하면서 또다시 방북취재의 투혼을 불사르게 된 것은 내가 대표기자로 있는 뉴스로(www.newsroh.com)의 필진 강명구 마라토너작가가 2017년 유라시아대륙횡단에 나서면서다.
강명구 작가를 따라 나도 꼭 가야겠다며 2018년 초부터 갈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강명구 마라토너 본인도 언제 어떻게 입북허가가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현역기자로 개별방북을 해야 하는 나로선 첩첩산중(疊疊山中)에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비자를 신청하고 한달여후 LA의 통일운동가 등 두명과 함께 북경의 북 총영사관에 입국비자를 받으러 날아갔다. 강명구 마라토너가 북 접경지역인 중국 단둥에 도착한 2018년 10월초의 일이다.
그러나 막상 북 대사관에선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게 아닌가.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강명구 마라토너의 입북이 내부적으로 거절되면서 강명구씨 평양 환영식을 주된 방북 목적으로 신청한 우리까지 취소의 날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망연자실했지만 미국서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서울로 다시 돌아와 방북계획을 재작성하고 왜 방북해야 하는지 설득력있게 취지를 설명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을까. 불과 일주일 후 입북 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거의 유례없는 초스피드로 승인이 난 것이다.
난 솔직히 비자가 나올지 확신이 없었다. 다른 두사람과 달리 현역기자의 신분인데다 사실상 개별 방북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북 당국이 볼 때 난 남조선의 ‘요주의 기자(?)’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이나 공신력있는 민간단체의 방북행사를 취재한 풀기자와 달리 전혀 알려지지 않은 개인미디어의 현역기자에게 방북허가를 내준 것이 신기하기조차 했다.
대동강의 일출
그동안 따르지 않던 방북 운도 작용했다. 현재 미국 시민권자는 국무부의 여행허가 금지로 입북이 차단돼 있고 한국에 살고 있는 국민들은 통일부 허가 없이 개별방북이 불가능하다. 미국의 경우, 오직 영주권을 가진 해외동포들만 신고후 방북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동북아 정세의 격변기에 대한민국 국적자이자 미국의 시민인 현역기자가 방북하는 대단히 희귀한 사례가 된 것이다.
당초 예정보다 한달이상 늦은 11월 10일 서울을 출발해 경유지인 중국 심양에 도착했다. 매일 평양행 비행기가 있는 북경과는 달리 심양은 일주일에 두편밖에 운행이 안되지만 당일 비자를 수령하기는 편했다. 무사히 이날 오후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공항까지 날아갔다.
한시간이 채 안되는 짧은 여정이었지만 고려항공 안에서 복잡한 감회(感懷)에 젖어들었다. 북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남한 국적인 내가 ‘통일 기러기’라도 된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북쪽의 심양에서 남쪽의 평양으로 날아가는 고려항공에서 겨울이 오기전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는 철새의 모습이 반추(反芻)되면서, 기자인생의 후반기를 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 밀알이 되고픈 생각이 교차했다.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고 또 북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며 정보를 담아두었지만 한번 가서 보고 듣고 경험해보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와르르 무너지는 편견도 있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충격도 있었다. 무엇보다 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 아니 우리 민족의 거의 절반이 살고 있는 북에 대해 알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뼈저린 자성을 하게 되었다. 그들 또한 우리에 대해 모르고, 오해하고, 편견을 갖는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한겨레의 동류의식, 누천년을 함께 하며 말과 문화가 통하는 한민족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70여년의 무자비한 단절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서 방북직후 한국은 물론, 뉴욕과 뉴저지 펜실베니아 버지니아 워싱턴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지의 동포사회를 순회하며 ‘찾아가는 방북강연회’를 열었다. 비록 사진들과 동영상일망정, 지금 이순간 북녘 땅과 그곳에 사는 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내가 북녘땅에서 체험한 것들을 나누며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평양전철역에서 가판신문을 읽는 시민들
그런 보람과 함께 2018년 11월 방북에 이어 2019년 3월 두 번째 방북을 할 수 있었다. 첫번째 방북이 오랫동안 단절된 우리 민족의 반쪽과 해후한 예비단계였다면 두 번째 방북은 북녘 동포들과 흉금을 터놓고 이해의 폭을 넓힌 집중단계라 할 수 있다.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안타깝게 합의를 이루진 못했지만 북은 2017년 선언한 경제 총력 매진의 기조를 올해도 흔들림 없이 추진하고 있다. 북 주민들도 기왕에 단련된 자력갱생의 자신감으로 생활전선에 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연재기에선 북의 지명이나 인명을 북녘 표기 그대로 표기했다. 다소 어색하게 보이겠지만 이 또한 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일망정 평화통일을 간절히 소망하는 한 언론인의 북녘 체험을 담은 이 책이 오늘의 북한과 북녘 주민들을 이해하고 마음의 빗장을 열어 교류와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편 계속)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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