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이곳에선 ‘힐링’의 시간이 된다고 합니다.
바로 ‘도심속 사찰’ 길상사(吉祥寺)를 두고 한 말입니다. 잘 알려진대로 길상사는 장안의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 님이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사찰로 다시 태어난 곳입니다.
좋게 말해 풍류요, 질펀한 술과 색, 음험한 모의가 꾸며졌음직한 은밀한 요정을 청정도량으로 180도 바꾼 원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잠시 다른 글을 인용합니다.
<김영한(1916∼1999)은 열 다섯살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어 청상(靑裳)이 됐다. 갈 곳이 없는
영한은 권번 기생으로 나섰다. 영한은 계란형의 미인으로 가무는 물론 시서화가 뛰어나 곧 최고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연히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그녀를 연모했다. 스무살 되던 해 그녀는 뛰어난 재주를 아까워하던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지원하던 사람 중의 한명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자 2년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함흥으로 돌아왔다. 은인을
옥바라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였던 백석 시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둘은 만난 지 하룻만에 동거를
시작해 석달간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에 백석의 아버지는 아들을 영한으로부터 떼놓고는 다른 여자와 강제 혼인을 시켰다. 백석은 혼인날 밤 도망쳐 먼저 서울로
와 있는 영한과 다시 만나 한동안 동거했다. 그러나 영한은 젊은 백석의 앞날을 걱정해 헤어지자고 했고, 그런 영한에게 백석은 러시아로 떠나자고
졸랐다. 이에 영한이 숨어버렸다.
마침내 백석은 혼자 러시아로 떠났고 둘은 영영 생이별해야 했다. 해방된 다음 백석은 북한으로 돌아왔다. 그새 영한은
서울에서 요정을 열어 큰 돈을 벌었다. 이후 영한은 대원각을 열어 60, 70년대 막후에서 ‘요정정치시대’를 펼쳐갔다. 그 대원각이 바로 지금의
길상사다.
영한은 살아 생전 매년 백석의 생일이면 하루동안 곡기(穀氣)를 끊고 방안에 앉아 불경을 외우며 그를 기렸다고 한다. 또한
수억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 문학도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말년에 백석과의 다하지 못한 이승의 사랑을 저승에서 잇고자 소원했다.
87년 영한은 미국에 있던 법정 스님을 찾아 쾌척할 뜻을 비쳤다. 당시 가격으로 1000억원이 넘었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을 살던 법정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대원각은 법정 스님이 머무는 암자의 본사인 송광사에 희사되었고,
길상사로 개사하기까지 송광사 분원이 되었다. 97년 개사식에서 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고 고백함으로써
세기의 로맨스가 마침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전해진다. 길상사라는 이름은 개사식 때 미국에서 돌아온 법정이 영한에게 선물한 '길상화 보살'이라는
법명에서 유래한다.> -아시아경제 서울스토리 ‘길상사’에서 발췌.
길상사는 그래서 한 여인의 기구한 사랑과 법정스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길상사의 소문을 익히 알면서도 한번
찾아가는 인연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오월 어느날 길상사를 다녀온 것은 뉴욕에서 잘 알던 보살님이 귀국후 안타깝게도 급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마침 49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기때문입니다.
이날 저는 차를 가져갔습니다만 주차공간을 생각하면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4호선 한성대역에서 내리면
길상사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탈 수도 있고 택시를 이용하면 5분, 걸어서도 20분이면 닿으니 적당한 운동도 되니까요.
길상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삼각산 길상사'라는 현판이 달린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보는 사천왕상과 같은 것은 볼 수 없는데 기존의 건물을 사찰로 바꾼만큼 공간의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49제는 일주문을 통과해 왼쪽에 있는 지장전에서 올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날 차가 막혀서 이미 제사가 시작되었고 지장보살상
앞에 차려진 제상에는 모두 네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워낙 절의 규모가 큰만큼 49제와 함께 다른 영가분들의 제도 함께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인상적인 장면은 주지스님이하
길상사 스님들이 한분도 빠짐없이 49제에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었습니다만 49제에 모든 스님들이 참석하는 것은 길상사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는 스님네가 모두 모여 정성스레 빌어주는 기도에 얼마간 마음의 위안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제를 마치고 스님들과 가족들이 영정을 모시고 마지막 이별을 하러 떠납니다. 길상보탑을 한 바퀴 돌고 소전대에서 영가의
유품을 태우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길상사는 여느 절과 다른 것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종교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처음 본 이들은 누구나 고개를 RI웃합니다.
기존에 보던 관세음보살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성모마리아상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길상사
개산당시 천주교신자인 조각가 최영태씨가 제작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이라고 합니다.
길상사가 문을 여는 날에도 법정스님과 김수환추기경이 함께 자리했다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길상보탑도 특별합니다. 길상화 보살과 법정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이 탑은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 교류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었습니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는 날 그녀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 하나만을
받았고 7천여평 절터와 전각 모두를 보시하는 그녀의 바람은 단 하나, 이곳이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단 두마디의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죄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길상사 홈페이지 ‘공덕주 길상화’에서 발췌.
길상사의 중심은 바로 ‘극락전’입니다. 보통 부처님을 모신 곳은 대웅전이라 하는데 길상사는 대웅전 대신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극락전이 본법당입니다.
이밖에 재가자들을 위한 ‘길상선원’과 잠시 참선과 명상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침묵의 집’, 소규모 법회나 회의를 위한
공간인 ‘설법전’, 도서관과 스님들과 불자들의 공양간인 ‘선열당’이 있습니다.
길상사는 사실 사찰이라기 보다는 웅장하면서도 기품있는 종가댁 고택(古宅)같은 느낌이 듭니다. 작지만 운치있는 개울이
흐르고 궁중의 후원같은 담벼락에 무엇보다 서울 도심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만큼 풍성한 나무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길상사 경내의 나무들은 100% 한국산 자생식물입니다.
길상사 경내의 식물들을 보시하고 가꾸는 한분의 불자가 계신데 이 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 하며 그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새삼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이날 참으로 큰 행운이 있었습니다. 길상사를 찾은 김에 한 거사님께서 주지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제안한 덕분이었습니다. 주지 스님 처소(處所)는 ‘청향당’이었는데 마침 차를 다리고 계셨습니다.
덕운스님은 법정스님의 상좌스님으로 주지는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소유’로 잘 알려진 법정스님의
제자답게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분이었고 절살림도 허투루 나가는 법 없이 아주 잘 챙기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낯선 객의 돌연한 방문에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시며 귀한 보이차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차를 다리시면서 스님은 계속
무릎을 꿇은채 계셨는데 그 앞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게 송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길상사와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여주시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적당히 맞장구치는 뉴욕의 불자가 기특해
보였을까요.
"주지스님 쉬고 계시는데 너무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는데, 스님은 “거사님,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한 적 없지요?”하시는게 아닌가요.
제 생전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무슨 재주로 보겠습니까라는 표정으로 눈만 꿈뻑 꿈뻑 떴더니 “가시기전에 부처님 진신사리 보고
가십시요”하시는게 아닌가요.
알고보니 스님 바로 오른쪽에 마치 유리호로병처럼 생긴 것이 세개 있었는데 바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안치된 사리구였습니다.
오색영롱한 부처님의 사리들을 제 눈으로 보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처님의 혈액이 응고한 응혈(凝血)사리(舍利)까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고운 모래와도 같은 것이 붉은 빛을 띄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주지스님의 허락덕분에 이렇게 뉴스로
독자분들과도 공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
이 진신사리는 미얀마의 노스님께서 길상사에 기증한 것인데 며칠 되지 않아 제가 방문한 길에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보물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귀한 진신사리를 육중한 금고가 아닌 스님 처소에 편하게 두고 계시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상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한 이야기를 이렇게 뒤늦게 공개한 것은 혹시라도 제 기사때문에 잘못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때문이었습니다. ^^
주지스님과 30여분 담소를 나누면서 바로 옆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졌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한 것처럼, 어쩌면 진리의 길도
우리 옆에 바로 있는데 그걸 모르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불현듯 들더군요.
어쨌든 스님의 호의가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친 김에 법정스님의 진영(眞影)과 유품들을 모신 진영각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생전에 법정스님은 길상사에서 단 하루도 머물지 않았습니다. 몇 달에 한번 법문을 하러 오시긴 했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
폐를 끼치기 싫다며 산중 깊은 곳에 있는 당신의 암자로 가시곤 했기때문입니다.
열반(涅槃)에 드시던 마지막날 밤 이곳에 계신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길상사에 머무신 날이었다고 합니다.
‘무소유’ ‘서있는 사람들’ ‘홀로 사는 즐거움’ ‘산에는 꽃이 피네’ ‘일기일회’ 등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로 대중에 잘
알려진 법정스님의 흠향을 맡고 보니 가슴속으로 뻐근한 감동이 느껴지는듯 했습니다. 진영각 오른 편 작은 화단엔 법정스님의 유골이 봉안돼 있다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길상사의 하루,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있다면 길상사에 들러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안의 나를 들여다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