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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뉴욕 편지
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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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119주기④] 뉴욕타임스의 대특종과 대오보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4-10-19 (일) 23:15:32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첫날 기사송고1882년엔 명성황후 피살 오보


 

명성황후의 시해는 저물어가는 19세기 세계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전시도 아닌 평시에 외국(일본)이 남의 나라 궁궐을 부수고 들어가 직접 살해했다는 점에서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만행이었기때문입니다.


 

훗날 죽음의 과정을 증언한 여러 보고서는 차마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는 잔인함의 극치였지만 ‘칼로 살해해 시신에 석유를 부어 불태웠다’는 당시 언론 보도만으로도 세계는 경악했습니다. 120년전 세계 모든 유력 언론은 물론, 작은 도시의 마이너 매체에 이르기까지 조선왕비 시해사건에 대한 속보를 끊임없이 만들어낸 이유입니다.

 

 

 

 


 

그중에서도 뉴욕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 1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뉴욕타임스는 1895년 10월12일자로 보도했습니다. 송고일 10월11일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사흘만의 일이었습니다. 며칠씩 걸리는 전보에 의존하거나 국제 증기선에 실린 현지 신문을 통해 몇 달뒤에 소식을 접하는 100년도 더 된 시절의 언론치고는 실로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보도였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이 벌어진 당일에도 관련 기사를 뉴욕타임스가 송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1895년 10월8일 뉴욕타임스는 일본 요코하마 발로 ‘한국의 반개혁 폭도들’ 이라는 짧은 기사를 긴급 타전합니다.

 

 

 

 


 

뉴요커들이 10월9일 보게 된 이 기사는 작은 제목으로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 달려 있었지요. 내용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있는 기자가 알려왔다. 왕의 아버지이자 반개혁파 지도자인 대원군이 무장세력을 이끌고 왕궁에 난입했다. 왕비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다”는 한 문장에 불과했지만 이른바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며 왕비 신상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팩트’를 정확히 보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낭인배들이 명성황후의 시신(屍身)을 불태우는 바람에 한동안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날의 1보는 사실상 뉴욕타임스의 대특종이었던 셈입니다.


 

◆ ‘고종과 명성황후 피살’ 뉴욕타임스의 대오보


 

흥미로운 것은 뉴욕타임스가 명성황후와 고종이 시해됐다는 엄청난 오보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을미시해가 일어나기 13년전인 1882년 8월18일 런던의 한 신문을 인용한 보도였습니다. 다음은 기사 전문.


 

“런던에서 8월17일 수신된 팰맬 가제트에 따르면 조선에서 전면적인 반란사태가 일어나 왕과 왕비가 살해됐다. 일본 공사관은 반외국파들과 관련된 조선인들에 공격으로 불에 탔다. 일본 군인들이 서울의 한강에 급파됐다. 프레스 어소시에이션 기자에 따르면 조선의 반란은 공식확인됐으며, 사망자가운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장교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1866년 열다섯살의 나이에 왕비로 간택(揀擇)된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섭정(攝政)을 저지하기 위해 1873년부터 반대세력을 규합,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대원군을 축출(逐出)한 후 민씨 척족과 개화파를 대거 중용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과 권력암투가 계속됐지요.


 

1882년 7월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군대가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일본교관이 살해됐습니다. 이 때 명성황후는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납니다. 대원군의 밀명을 받은 난군이 궐내로 난입(亂入), 자신을 찾아 나서자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무예별감 홍계훈의 도움을 얻어 피신한 것이지요.


 

뉴욕타임스의 오보는 명성황후가 그해 여름 50여일간 도피한 사이 국상이 선포된데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국상(國喪)이었지만 궁궐 피습 등 극도의 혼란속에 고종까지 죽은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셈입니다.


 

명성황후가 다시 돌아오고 대원군과의 권력암투가 계속되면서 뉴욕타임스는 명성황후를 더욱 주목하게 됩니다. 1889년 6월4일 ‘왕비는 허수아비가 아니다’라는 기사에서 “왕비는 조선의 가장 힘센 권력층의 하나이고 왕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공공연히 전달한다. 궁안에 자신의 지지기반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애연가(愛煙家)라는 사실도 흥미를 끕니다. “왕비는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다이아가 달린 비단옷을 입는다. 역시 다이아가 박힌 허리띠 장식을 하고 미국산 담배를 즐겨 피운다.”


 

비록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그녀를 싫어하는 백성들도 있었지만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이 앞장선 무뢰배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됐다는 사실에 조선의 민심은 들끓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기치하에 의병의 봉기(蜂起)가 일어난 것입니다.


 

백범 김구(1876-1949)가 스무살 때 한 일본인을 척살(刺殺)한 것도,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해 세계를 놀라게 한 안중근의사(1879-1910)의 쾌거도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배경이 작용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살아서 청일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죽어서 동북아의 역사를 바꾼 존재였습니다.


 

◆ ‘러시아 킬러’ 헤트로바 일본 주시


 

1896년 1월23일 샌프란시스코 콜은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합니다. 명성황후의 죽음이후 한 러시아인 킬러로 일본이 긴장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디트로이트 출신 유지 F H 클라크 박사의 증언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직접 듣고 전한 스토리였지요.


 

‘음모자 헤트로바(Hetrova, The Intriguer)’라는 기사는 클라크 박사의 삽화(揷畵)를 곁들인 가운데 “킬러이자 외교관인 러시아인은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몇건의 살인 등 여러 나라의 사건들과 관련 있다. 그는 왕비의 죽음이후 지금 일본에서 몇가지 의문의 목적을 갖고 체류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위험인물인 그를 일본 형사들이 뒤쫒도록 러시아가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입니다.

 

 

 

 


 

클라크 박사는 “그가 요코하마 시내에 나가면 일본 형사들이 앞에 두명, 뒤에 두명이 따라붙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전쟁의 빌미를 주는 일이 그에게 발생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의 이름은 헤트로바이고 불가리아 등 많은 지역의 살인에 얽혀있다. 헤트로바는 한국의 정치혁명에 영향을 주려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2년뒤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난 것을 고려하면 러시아가 일본과의 파워게임을 위해 복잡한 정치외교적 음모에 관여했을 개연성이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헤트로바는 6피트2인치(189cm)의 신장에 몸무게가 260-270파운드(약 120kg)나 되는 거구로 묘사됐습니다.



 

한편 클라크박사는 “미국에선 믿지 않지만 조선왕비는 확실히 죽었다. 조선에 가서 사실을 확인한 도쿄주재 미국공사 스테픈 보우살로부터 들은 것이다. 궁궐이 피습(被襲)됐을 때 네명의 여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포함해 3명이 죽었고 다른 한명을 기어서 빠져나왔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왕은 다시 그녀에게 왕비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녀는 대단한 여성이었다. 정치 외교는 물론, 막후조종에도 능했지만 결국 생명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습니다.


 

◆ 명성황후 시해범 일본서 피살


 

1904년 3월24일 노스다코다의 윌리스톤 그래픽지가 ‘시해범 피살’이라는 기사를 올려 독자들의 시선을 끕니다. 을미사변때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르는 일본 낭인배들을 위해 궁궐에서 인도한 우범선이 피살된 사건이었습니다.


 

우범선은 당시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로 명성황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몰락하자 일본으로 피신합니다.


 

도쿄에서 망명 생활을 한 그는 암살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이름과 신분을 감추고 살았으나 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조선의 열혈청년(熱血靑年)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 보도에선 조선에서 온 두명의 남성이 우범선을 살해한 것을 무려 5개월이 지나고서야 알려졌다고 전합니다.



 

이 사건이 조선의 정세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일본이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기때문입니다. 우범선이 일본으로 피신한후 조선은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시해가담이 정치적 행위이기때문에 인도할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일단의 조선인들이 우범선 처단(處斷)을 맹세하게 된 것입니다.


 

앞서 밝힌대로 우범선은 정체를 감춘 채 은둔(隱遁)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1903년 10월 어느날 두 사람이 우범선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일본에서 공부하며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범선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하지 않았고 함께 술을 먹고 카드게임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친하게 되었고 3-4일을 우범선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10월25일 저녁 술을 먹으며 우범선과 대화하던 한사람이 갑자기 칼을 빼내 찔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철퇴로 머리를 가격했습니다. 우범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신문에 따르면 칼로 찌른 사람은 고영근이었고, 철퇴를 휘두른 사람은 노원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살인혐의로 체포됐으며 주머니 안에선 ‘왕비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에 가는것이 위임됐다”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이들에게 엄한 처벌을 내릴 것으로 믿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고영근은 만민공동회 사건 등으로 조선에 돌아갈 경우 체포될 수 있었으나 ‘국모시해범’을 처단한 공적으로 고종은 그의 죄를 사면해 주었습니다.


 

<5편 계속>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10:10:47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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