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에선 긴장감 서린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판문관’이라는 상점부터 반기는게 관광지에 온 느낌이다. 미국과 캐나다간 국경 사이에 있는 면세점을 만난 듯 했다. 고운 조선옷을 입은 여성들이 개성의 고려인삼을 재료로 한 다양한 상품들과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10여분 둘러본후 유럽에서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인민군 병사의 안내로 판문점 투어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사진촬영 등 일체의 통제가 없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남북 대치현장이라는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판문점에선 북측 지역엔 두 개의 특별한 역사 전시장이 있다. ‘정전담판회의장(1951~1953)’과 ‘정전협정조인장’이다.
정전담판회의장은 유엔군과 미군, 북한과 중국의 대표가 협상을 하던 장소로 당시 테이블과 10개의 의자, 보조 테이블 두 개와 의자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정전협정조인장은 수백평 크기의 넓은 공간에 인민군 대표와 유엔군 대표가 서명한 탁자와 깃발, 서명집 등이 유리함에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왜 두 시설물 모두 북측 지역에 있을까. 그것은 정전협상이 유엔군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먼저 요청했으니 자연스럽게 북측 지역에 들어와 협상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 북측에 휴전협상을 처음 제안한 텔렉스(전보) 등 자료와 사진들이 현장에 전시되고 있었다.
판문점을 방문한 동안 뭐라 말할 수 없는 아픔이 肺腑(폐부) 깊숙한 곳에서 밀려왔다. 일행과 함께 판문각 2층 전망대에 올라 인기척이 전혀 없는 자유의 집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는 내가 있는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우리 말고도 프랑스 관광객 등 여럿이 와서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데 정작 자유의집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뭐가 거꾸로 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늘 남에서 적막강산 같은 북을 바라보며 헐벗고 음산한 凍土(동토)의 땅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거꾸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지금 초현실의 세계에 있는건 아닌지 어리둥절했다.
지금 내 앞에서 아주 곰살궂게 웃으며 열심히 설명하는 紅顔(홍안)의 군인이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만일 내가 남쪽에서 판문점에 왔다면 당연히 자유의집에서 늠름한 국군장병의 설명을 들으며 황량한(?) 북쪽 판문각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남북정상이 역사적 만남을 가진 남북 경계선이 코 앞에 보인다. 저 선을 넘어 차를 타고 한시간이면 내가 사는 일산에 닿을텐데... 하지만 현실은 돌아가려면 다시 평양으로 올라가 중국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타고 가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수백만의 이산가족들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70년 넘는 세월, 咫尺(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생사를 모른 채 평생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야 했을까.
우리는 어쩌다, 무엇 때문에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고 있는 것일까. 70여년전 우리는 동족상잔의 뼈아픈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원한이 대물림되서는 안된다. 지금 남북 정상이 왜 만나고 있는가. 남북이 화합하고 평화를 이루어 공존공영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겨레의 화합을 반대하고 분단의 이익을 노리는 세력이다.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평화냐 폭력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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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평양오딧세이(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