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70년대이후 몇 차례 유류파동의 경험을 했지만 미국인들이 개솔린 등 연료를 구하지 못해 혼이 난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뉴욕 등 동북부에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이번 허리케인 샌디의 상처가 워낙 크고 깊은데다 후폭풍까지 만만치 않아 뉴욕 뉴저지 등 동북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도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고작 미국생활 10년인데 100년에 한번 겪을만한 자연현상을 연달아 겪으니 직업이 기자라 그런가 공연한 넋두리를 해봅니다. 물론 지난해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기상이변에 따른 특별한 즐거움이었지만요.
기억하시죠? 시월의 멋진 단풍에 쌓인 暴雪(폭설)을. 지난해 10월 27일 100여년만에 뉴욕에 폭설이 내려 채 지지 않은 단풍과 하얀 눈의 조화가 평생 한번 보기 힘든 멋진 장면을 연출해주었지요.

미리 큰 눈이 내린 탓인지 지난 겨울은 유독 눈이 없었습니다. 뉴욕 지역은 서울에 비해 눈이 자주 오는 편인데 치워야 할만큼 눈이 제법 내린게 두어번밖에는 안됐으니까요. 안그래도 올 겨울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장기예보도 있는데 10월의 마지막 날들(30~31일)에 들이닥친 허리케인 샌디는 우려했던것보다 훨씬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미 뉴스로 보도된 것처럼 집과 차량들이 광범위하게 침수되고 나무들이 쓰러지고 도로가 유실되는 등 허리케인의 직접적인 피해를 요행히 면한 사람들도 정전피해로 짧게는 며칠, 길게는 지금까지 일주일이 넘도록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날도 추워졌는데 정전으로 난방도 안되는 집들이 많고 조리와 물까지 끊어진 경우도 많아 집은 멀쩡한데도 살 수가 없는 이들이 이웃집이나 친척집, 임시대피소로 피난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편마저 강건너불로 볼 수 있었던 행운아들도 피해가지 못한게 있습니다. 바로 “개스(Gas) 대란”입니다. 미국에선 아다시피 휘발유를 개스(사실은 개솔린)로, 주유소도 개스 스테이션으로 부릅니다.(그래서 처음온 이민자들은 개스 스테이션을 LPG충전소로 착각하는 일도 생깁니다.)
일단 허리케인이 불어닥친 다음 정전은 개스 펌프를 작동시킬 수 없어 문을 닫은 주유소들이 대부분이라 뉴저지 등 허리케인의 직접 피해가 심한 지역은 지난 31일부터 휘발유구하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뉴욕으로 옮겨온 것은 하루 뒤였는데 이번 허리케인으로 개스 파이프가 차단되는 등 두곳의 유류저장소가 문을 닫아 주유소들에 개스공급이 중단됐기때문이죠. 그래서 처음엔 정전으로 개스를 못팔았지만 전기가 복구되고도 하루 이틀 영업한 후 재고가 바닥나면서 영업을 못하는 사태가 속출한 것이지요.
저는 차 두 대에 연료가 절반 정도 있었는데 평소 허드슨강 건너 뉴저지에서 주로 주유하기 때문에 태풍이 물러간후 볼 일을 보러갈 때 넣을 생각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인들은 미리 연료탱크를 가득 채워두는데 저는 경험부족으로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거죠.
아참, 왜 뉴저지에서 휘발유를 넣는지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면 뉴저지가 뉴욕에 비해 가격이 15~20% 싸기때문입니다. 보통 중형승용차에 14갤런정도 휘발유가 들어가는데 뉴욕이 갤런당 4달러라면 뉴저지는 3.5달러 정도입니다. 가득 채우면 6~7달러 차이가 나니까 제법 절약이 되는거죠.
그럼 뉴욕사는 사람들이 모두 뉴저지로 건너가서 채울 것 같지만 휘발유를 넣기 위해 일부러 뉴저지에 가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리 건너는 톨비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조지워싱턴 브리지는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들어올 때만 톨비를 내는데 무려 12달러입니다. 조지 워싱턴브리지 북쪽의 타판지 브리지는 5달러 싸지만 그곳을 이용하려면 15마일 이상은 돌아와야 하니까 그것도 무식한 일이죠.
특히 뉴욕 플러싱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경우 브롱스나 맨해튼을 오갈 때 유료다리가 있는데 이것이 왕복하는데만 10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니 개스 넣기 위해 일부러 뉴저지로 가는 바보는 있을 수가 없고 볼 일이 있어 넘어갈 때마다 가득 채우고 온답니다.

허리케인이 지난달 30일 물러가고 뉴저지에 넘어간 것은 다음날인 31일 오후였는데 그날 제가 지나친 포트리와 팰리세이즈팍 일대의 주유소가 20개가 넘었지만 문을 연 곳은 딱 한군데였습니다. 자동차들이 얼마나 줄을 섰는지 끝이 안보이고 인근 도로까지 정체 현상을 빚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만해도 뉴욕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물론 정전으로 일부 주유소가 문을 닫았지만 차들이 밀린 곳은 없었거든요. 그러나 1일 오후부터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수요가 갑자기 몰리고 주유소의 在庫(재고)가 떨어지면서 문을 닫는 주유소들이 속출했거든요.
주말인 2일부터는 뉴욕이나 뉴저지나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슬슬 걱정이 몰려 왔습니다. 일요일에 한 100마일 거리를 달릴 일이 있는데 차 한 대는 게이지가 가장 밑바닥에 와 있고 나머지 차 한 대의 기름은 절반이 채 남지 않을 상황이었으니까요.


제가 사는 동네에선 수퍼마켓만 가려해도 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차가 두 발이나 마찬가지인데 고민이 안될 수 없었지요. 앞으로 이런 상황이 일주일은 더 갈지 모른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2~3일이 지나면 바닥이 날 것 같고 저도 마침내 휘발유찾기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D-데이는 일요일 새벽, 사람들이 적은 새벽시간에 가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경험자들의 말을 들었기때문입니다. 공교롭게 이날은 서머타임이 해제되는 날이어서 한시간을 버는 날이었습니다. 5시반에 깼지만 실은 서머타임으로 치면 6시반이었지요. 너무 이른 것 같아서 한시간쯤 있다 나가면서 비스켓과 뜨거운 차를 준비했습니다. 몇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까요.
6시50분경 차를 몰고 옆동네로 넘어갔습니다. 두곳의 주유소가 모두 닫혀있었는데 한 곳은 차들이 30여대 줄을 서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7시면 문을 열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맨 뒤로 가서 차를 유턴해서 돌리는데 느닷없이 언더커버 경찰차가 경광등을 키며 나타나더니 사복경찰관이 나와 신경질적으로 “줄 서지말고 그냥 가라”고 소리치는겁니다.
중앙선을 넘은 유턴이었기 때문에 티켓을 안먹은 것도 감지덕지(?)하고 10분 거리에 있는 대로인 센트럴 팍 애버뉴 선상으로 갔습니다. 이곳엔 반경 3~4마일내에 주유소가 10여곳이 있기 때문에 한두개는 열었으리라 예상했지요.
그러나 전혀 문을 연곳이 없더군요. 거의 목표지점 끝에 왔는데 한 곳에 차들이 20여대 줄지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불문곡직 맨 뒤로 가서 줄부터 섰습니다. 주유소 앞은 노란색 리본으로 차단돼 있었지만 차들이 줄을 선 것을 보니 곧 문을 열겠거니 한겁니다.
웬걸, 20분 30분 1시간이 지나도 문을 열 기색이 없었습니다. 연료가 얼마 없어서 히터는 커녕 시동도 끄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참지 못한 차들이 한두대 씩 포기하고 전 30분을 더 기다렸지만 변화가 없어 결국 포기하고 차를 돌렸습니다. 짐작하기로는 어떤 차가 혹시해서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을 보고 다른 차들이 연쇄적으로 섰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바로 한 블록 위의 주유소가 문을 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지날 때는 아무런 징후가 없었는데 다른 곳에서 두시간을 기다리는 사이 문을 연 것이었습니다. 부리나케 줄을 따라 갔지만 정말 끝이 없더군요. 언덕 좁은길로 수백미터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 행렬에 질려서 돌아섰습니다. 최소한 서너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고 운이 없다면 중간에 주유소 기름이 바닥나는 상황을 맞겠다 싶었습니다.

떡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고 나온 김에 인근의 큰 수퍼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금쪽같은 휘발유를 쓰고도 허탕을 친게 약오르지만 어쩌겠습니까. 아까 제가 경찰에 의해 쫒겨난 주유소로 다시 가서 줄을 설 생각이었지요. 좀 한갓진 도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다리면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주유소 앞엔 차들이 한 대도 없었습니다. 이곳 역시 무작정 차들이 서 있었던 겁니다. 문 열 기색이 없으니 썰물처럼 빠진게지요. 그럼 대체 아까 그 경찰은 뭔가? 고개를 갸우뚱했지요. 그 역시 지나는 길에 유턴하는 제 차를 보고 잔소리를 했던 모양입니다.
미국인들의 무작정 줄서기로 행태에 실소(失笑)가 나왔습니다. 불현듯 1990년 옛 소련 모스크바에 취재를 갔을 때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그 당시 모스크바 시민들은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는데 거리 곳곳에 줄을 선 행렬이 가득했습니다.
그곳 기자가 설명해주기를 워낙 물건이 부족해서 평소 모스크바 시민들은 수중에 돈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적은 쪽지를 갖고 다닌다고 합니다.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선 줄이 있으면 일단 바쁘지 않으면 줄부터 선 채 앞사람보고 뭘 파는 줄이냐고 묻는다는군요.
그 물건이 쪽지 리스트에 있으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기다렸다 사는겁니다. 그 기자는 모스크바 시민들이 돈이 많은데 그 이유가 살 물건이 없기때문이라고 농반진반의 말을 하며 맥없이 웃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휘발유에 국한한 것이긴 하지만 20여년전 모스크바 상황이 지금 뉴욕과 꼭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이 동네의 또다른 주유소에 한번 더 가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빙고!’였습니다. 문을 연 것입니다. 이곳 역시 아침에 갔을 때는 텅 비었는데 어느 새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거꾸로 끝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차를 헤아렸더니 모두 63대, 이 정도라면 한시간이면 기름을 넣을 것 같더군요.

꼬리 부분에 통제하는 경찰이 두명이 서 있길래 이번엔 “FM대로” 차를 돌릴 수 있는 곳에서 돌려 나왔습니다. 좁은 2차선도로였기 때문에 경찰이 개스를 넣는 차들만 진입을 허용하더군요.
줄은 제법 길었지만 슬금슬금 차들이 잘 빠졌습니다. 아마도 주유기가 풀가동되는 모양입니다. 40분쯤 지나니 마침내 주유소가 보였습니다. 감개무량입니다. 고진감래라더니 드디어 저도 개스전쟁의 승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보통휘발유가 4.29달러나 했지만 평소에 1센트라도 싼 곳을 찾던 알뜰함은 간곳없이 개스를 넣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엉뚱한 주유소에서 장시간 기다리는 헛수고때문에 근 4시간이 걸렸지만 기름을 가득 채우고나니 왜 그리도 포만감이 일던지. ^^ 막 자신감이 용솟음치더군요. “길 비켜라 내가 간다~”.


모쪼록 이 휘발유가 바닥나기전에 주유소들이 정상영업하기를!
‘천신만고 휘발유 구하기’를 이에 갈음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10:05:54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