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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뉴욕 편지
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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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못말려 <下> 김영삼을 생각한다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5-12-08 (화) 13:05:47

 

 

1986년 노태우의 이른바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 등의 개헌을 위한 단초(端初)가 마련되었지만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1971년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도 있었다구요.

 

DJ가 아니라 YS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대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안보론 등 ‘북풍팔이’가 여의치 않았을테고 같은 영남 후보라는 점에서 집권세력의 지역감정 조장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겁니다. YS의 경남 표에 박정희에 부정적인 중도적 유권자들도 표를 보탰을 것을 고려하면 야당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선거를 아쉬워하는 이유는 YS가 대선후보가 유력했음에도 막판 뒤집어졌기 때문입니다.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YS는 1969년 자택 근처에서 초산테러를 당하는 등 일찌감치 집권세력의 견제를 집중 받기 시작했습니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것도 YS였습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지 얼마 안된 김영삼이 야당의 선명성을 잃고 노회한 기성정치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빼어든 개혁의 기치(旗幟)였습니다. 그 서슬에 함께 부상한 이들이 같은 연배의 김대중과 이철승이었구요.

 

신민당의 대선 후보를 놓고 열린 경선 1차투표에서 김영삼은 최다 득표를 했고 2위 김대중 3위 이철승이었습니다. 과반수를 넘지 못해 2차투표에 들어갔는데 이철승 표가 김대중으로 몰리는 이변으로 YS는 뼈아픈 역전패를 했지요.

 

이와 관련, 훗날 신동아엔 전직 외사과 경찰 윤모씨의 현대사 증언이 실렸는데 중앙정보부가 대선구도를 손쉽게 하기 위해 이철승표가 김대중에 가도록 공작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박정희 입장에선 색깔론과 지역론을 펴기 쉬운 DJ와의 대결구도를 원했을 법 합니다.

 

당시 김영삼은 경선 결과가 발표된 뒤 "김대중 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고 의연하게 승복하는 연설을 하고 유세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의 95만표차 승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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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photo by 뉴시스

 

이땅에 민주주의를 회복할 기회는 그로부터 무려 16년뒤에 찾아왔습니다. YS의 목숨건 단식투쟁이후 전두환정권은 억압을 다소 풀었고 정치 규제가 완화된 틈을 타서 민추협이 결성되는 등 야권은 YS를 중심으로 결집할 수 있었지요.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DJ가 귀국한 것은 1985년 2월 8일입니다. 사실상 YS 홀로 한국을 지키던 상황에서 그의 귀국은 민주화 세력에 분명 힘이 되는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복잡미묘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민주화 동지이전에 숙명의 라이벌이었으니까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저는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으로 두사람을 지켜보았습니다.

 

1986년 이른바 노태우(사실은 전두환 기획?)의 6.29선언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은 박정희의 10월유신으로 강탈당한 대통령 선출권을 15년만에 찾아 왔습니다. 민주화세력만 합치면 군부독재도 정권교체도 이루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당(민정당)은 YS와 DJ가 절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않으면 결코 6.29선언이라는 만용(?)을 저지르지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단일화를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물론 양측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법을 한사코 얻으려 했지요. 안타깝게도 사람은 대의명분(大義名分)보다 개인적 성향이나 학연, 지연 등으로 친소관계를 잘 형성하지요.

 

두사람의 단일화를 놓고 평생을 반독재투쟁과 민주주의운동에 헌신한 재야투사 백기완 선생의 일화를 회고하고자 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백기완선생은 당시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그때 후보들은 사상 처음 TV연설을 할 수 있었는데 보도에 따르면 백기완선생은 원고도 없이 단한번의 NG도 없이 녹화를 마쳤습니다. 연설하면 DJ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지만 백기완선생의 연설은 정말 다시 보고싶을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트레이드 마크인 흰 두루마기를 입고 나와 걸걸한 목소리로 연설을 하면서 고문을 당해 몸이 망가졌던 기억을 회고할때는 울음을 삼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이 정말 애국지사요, 민주투사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백기완 선생에 관한 추억은 나중에 다시 한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강경 진보인사들은 YS와 DJ도 못마땅한게 사실이었고 그런 점에서 백기완선생은 적임자였습니다. 그러나 재야운동가가 대권을 가져갈 확률은 당연히 없었고 기실 그의 목적은 야당의 선명성을 유도하고 궁극엔 두사람의 단일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기완선생의 중재(仲裁)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단일화 합의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는 후보사퇴를 선언하면서 YS지지를 선언했습니다. YS가 중재안을 받아들인 반면 DJ가 거부했기 때문에 한편의 지지를 선언하고 물러난 것이지요.

단일화 실패로 야권은 분열되었고 영호남의 지역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더욱 뼈아픕니다.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원한다는 사람들이 지역으로 갈려 서로의 유세장에서 돌팔매를 하고 죽일 듯 달려드는 모습이라니요.. 물론 과격 투쟁의 배후엔 여당의 조종이 있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영호남 유권자들이 지역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판국에 어떻게 야당이 정권교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한 신문은 '33.3.%의 대통령이 탄생한다면?'이라는 우려섞인 사설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여당의 노태우와 야당의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 세사람이 표를 3분의1씩 가져가는 구도에선 당연한 예측이었습니다.

 

 

야당의 두 후보는 분열이 여당에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길 것을 알면서도 온갖 지역갈등의 상처를 안으면서 끝까지 선거를 계속했습니다. 나방은 자신이 죽을 것을 모르고 불로 뛰어들지만 그 나방보다 못한 판단을 하여 군부독재를 끝장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린 것이지요.

 

당시에 저는 백기완 후보가 YS를 조건부 지지한 것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번엔 DJ가 양보해야 할 차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구요? DJ는 YS에 두 번이나 신세(?)를 진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69년 YS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덕에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진 동년배의 DJ와 CS(이철승)도 주류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습니다. YS가 대권후보가 유력했지만 1차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과반수가 안돼 2차선거에 돌입했고 CS 표가 DJ로 옮겨지면서 엄청난 반전이 이뤄진 것을 아실 것입니다.

 

야당의 경선에 중정의 공작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었다시피 박정희 입장에서 출신지(영남)도 같고 공산주의자로 엮을 길이 없는 없는 YS가 진짜 두려운 후보였던 반면 DJ는 상대적으로 유권자가 적은 호남출신에 흑색선전을 펼치기에 좋은 먹이감이었습니다.

 

YS는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음에도 DJ의 선거유세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신세입니다. 또한 DJ가 전두환정권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후 홀로 남아 민주주의가 소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YS였습니다. 그의 목숨을 건 단식이 전두환의 폭압정치를 두손 들게한 결정적인 계기라는 것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DJ가 마음을 비우고 차기를 기약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권도 교체되고 지역감정도 자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역감정의 원조는 박정희정권이지만 이를 악화시킨 것은 양김의 대립과 분열입니다. 외골수 DJ 지지자들에겐 불편한 내용이 되겠지만 만일 DJ로 단일화됐다면 분명 DJ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마타도어가 횡행했을 것이고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중도보수성향의 지지자 상당수가 여당후보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1989년 자리양보 사진 - Copy.jpg

 

또한가지 우려(憂慮)는 군부의 동향이었습니다. 전두환정권은 군사정권입니다. 군부의 '성골'인 하나회를 비롯한 기득권층이 철옹성(鐵甕城)처럼 버티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동기인 노태우로 권력이 승계되면 모르지만 쿠데타의 못된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의 군부가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과연 용인했을지 궁금합니다. 그나마 YS는 영남출신에 반공 이미지, 상대적으로 온건한 민주투사라는 점이 고려될 수 있었지만 DJ로 정권교체가 되었다면 군부가 또다른 쿠데타를 획책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훗날 YS가 노태우, 김종필과 연합하여 통합민자당을 만든 이른바 ‘3당야합’도 평가의 여지는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1961년 5.16쿠데타를 시작으로 1992년 노태우 임기까지 남북분단의 대치속에 사실상 31년간 군사통치를 한 나라입니다.

 

중도성향의 국민들이 독재를 증오하면서도 선뜻 야당을 지지하기가 힘든 부분은 6.25전란의 뼈아픈 상처와 현실로 존재하는 남북대치 상황입니다. 이승만의 하야에도 불구하고 4.19 혁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불안정한 정권교체로 군부가 개입해 역사가 후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YS는 3당통합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를 따라간 상도동 인사들도 있고 거부한 인사들도 있습니다. YS가 대권욕에 사로잡혀 변절했다는 비난이 따라붙었지만 YS는 집권직후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 아무도 예상못한 혁명적인 조치로 사실상 야당의 정권교체 이상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어찌보면 군부와 재벌이 뒷통수를 맞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뒤를 봐줄줄 알았던 여당 후보가 수십년 적폐(積弊)를 화끈하게 도려냈으니까요. 그뿐인가요? 전두환과 3당합당의 파트너였던 노태우까지 법정에 세워 사형선고를 받도록 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궤변(詭辯)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비록 재임중 이들에 대한 사면조치를 했지만 여전히 강한 수구보수의 저항과 단임대통령의 한계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1993년 취임식.jpg

 

기대이상의 활약(?)으로 YS는 집권초기 지지율이 90%에 육박하기도 했지요. 여당인 듯 야당인 듯 헷갈리는 YS가 일종의 디딤돌 완충효과로 훗날 진정한 정권교체도 이뤄졌고 인동초 DJ의 대통령 등극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DJ가 87년 대선에서 양보를 했더라면 우리나라의 정권교체와 민주화는 10년은 더 일찍 올 수 있지 않았겠냐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YS는 재임중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서해페리호화재, 대구지하철 폭발 사고 등 수많은 참사로 얼룩졌습니다. 당시 일설엔 청와대에 있던 불상을 기독교 장로이기도 한 YS가 들어간 후 치워져 이런 횡액(橫厄)이 시작됐다는 말도 있는데 자비로운 부처님이 그런 해꼬지를 하셨을리 없으니 쌓이고 쌓인 우리나라의 안전불감증이 터져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세월호 참사같은 어이없는 사건이 터지지 않습니까.

 

기실 IMF사태도 기실 한보나 대우같은 부도덕한 기업들의 분식회계 등 그간 쌓인 부조리들이 주요인이었고 YS 홀로 뒤집어쓰기엔 솔직히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IMF사태는 YS의 많은 공적들을 퇴색시키고 빈정대는 유머의 단골소재로 삼는 뼈아픈 실정이 되었지요. 과보다 공이 훨씬 많은 YS였음에도 퇴임후 온갖 조롱의 대상이었다가 타계후 돌연 쏟아지는 언론의 용비어천가는 솔직히 당혹스럽기조차 합니다.

 

그저 망자(亡者)에 대한 예의일까요?

 

YS와 개인적 인연은 하나도 없지만 굴곡(屈曲) 많은 정치역정은 제가 살아온 시대였기에 이렇게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아다시피 YS의 한마디중에는 희대의 어록(語錄)들이 많습니다. 퇴임후 남긴 그의 대표적인 한마디는 ‘칠푼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그녀가 대통령 되기전이었지만 언감생심, ‘칠푼이’라니요. 머리가 나쁘기로 소문난 YS한테 칠푼이 소리를 들으면 그분의 아이큐는 계산가능하기라도 할까 싶습니다.

 

하긴 언젠가 ‘면도날 테러’를 당했을 때 YS가 문병을 가서 "나도 옛날에 초산테러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위로(?)했다죠. 아니 그런데 말입니다. 초산테러의 배후가 박정희 정권인데 그 말을 위로라고 들은 따님은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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