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폭격에도 고구려 암자 살아남아
평양에 도착한 날이 토요일이어서 공식 일정은 일요일부터 시작됐는데 봉수교회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재미동포들이 기독교 신자가 많다보니 알아서 잡은 일정 같았다. 그러나 봉수교회는 언론에 의해서 많이 소개되어 그닥 흥미가 끌리지 않았다. 교회보다는 사찰에 가면 좋겠다고 했더니 행선지를 룡악산 법운암으로 돌렸다. 결과적으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예로부터 ‘평양의 금강산’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는 룡악산은 중생대 지형의 기암절벽이 산정의 모양이 마치 룡(龍)이 날아가는 듯한 모양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해발 300미터 밖에 안되지만 날카로운 벼랑과 바위, 수백길 낭떠러지 덕분에 높이의 체감은 1천미터 급이었다.
법운암은 고구려 시대 창건된 영명사(永明寺)의 부속 암자로 영명사는 평양의 중심지인 모란봉 구역에 있고 법운암은 만경대 구역에 있다. 평양은 대동강구역, 보통강구역 등 18개 구역(서울의 구와 같다) 2개 군(강남군 강동군)으로 이뤄진 도시다.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때 서경으로 불린 평양은 서울의 한강과 흡사한 대동강과 지류인 보통강을 끼고 있다. 평양 금수산 모란봉언덕에 있던 영명사는 인근의 법흥사와 함께 평안남도 지역을 대표하는 대사찰이었다.
모란봉은 조선8경 중 하나로 꼽혔다. 영명사는 대동강과 능라도, 평양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어져 예로부터 명승지로 유명했다. 그 아래쪽에 부벽루가 있고 인근에 을밀대 등 평양8경의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영명사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국전쟁중 가해진 미군의 폭격 때문이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것이 어디 한두개랴만은 수천년의 고도(古都) 평양이 겪은 비극은 너무도 참담했다.
법운암은 암자이지만 아담한 법당과 함께 뒤편에 삼성각(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이 있고 작은 탑이 안마당에 세워져 어엿한 절의 위상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 출가후 2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다는 얘기에 가슴 뭉클한게 느껴졌다. 약 1500여년전 세워진 이해 애국심 많은 스님들을 배출했는데 암자 바깥에 있는 세 그루의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이 절의 젊은 스님 세 분이 승병으로 평양성 탈환 전투에 나서면서 각각 심은 것이라 했다
법운암 주지 대평스님은 “미군 폭격기가 무려 40만발의 포탄을 평양에 무차별로 퍼부었지만 법운암은 벼랑 가까이 위치해 미군기가 폭격하지 못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온전한 역사 유적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폭격의 표식(表式)으로 삼은 대동문을 제외한 대부분이 사라졌기때문이다. 평양의 서문인 보통문도 소실 위기에 처했지만 불 붙은 것을 주민들이 꺼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문에 평양은 전쟁후 복구한 많은 문화재들과 새로운 기념물들로 신구가 어우러진 거대한 선진 복합도시의 느낌이 강하다.
(8편 계속)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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