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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최초의 우주인(上) ‘유리 가가린’의 비장한 편지

글쓴이 : 김원일 날짜 : 2011-12-03 (토) 12:08:19

 

“가가린의 우주 비행 50주년”을 맞은 올해 러시아에선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비단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도 마찬가지다.

금년 여름에 첫 우주비행사(宇宙飛行士)의 기념비가 런던의 중심부에 있는 유명한 해양탐험가 제임스 쿡의 동상 맞은편에 세워졌다. 호주에서는 가가린이 1961년 4월 12일 지구 주위를 한 바퀴 회전할 때 탔던 우주선을 기념하여 ‘보스톡’(동방)이란 이름의 ‘우주맥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가가린의 동상들은 모스크바와 소피야에 이미 세워져 있다. 가가린의 이름을 딴 가가린 시(市)에는 가가린 기념박물관이 문을 열었으며, 달의 분화구에는 첫 우주 비행사의 이름이 붙여졌다.

지구의 경계를 넘었던 첫 인간의 삶은 어떠했을까?

가가린은 스몰렌스크 주(州) 그자트스크(현재의 가가린) 지역 클루시노 마을에서 1934년 3월 8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출생일은 3월 9일이다. ‘국제 여성의 날’ (러시아에서 3월 8일은 대대적으로 ‘여성의 축제일’로 기념 한다)에 사내아이의 출생신고를 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고 조산원에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는 당시 집단농장에서 대물림하여 일하던 스몰렌스크 농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라(유리의 애칭)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저녁 시간이면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앉아 책 읽기를 즐겼다. 다른 사람들의 시 낭독을 주의 깊게 두어 번 들은 후에 어린 가가린은 표정을 섞어가며 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가가린은 교내의 여러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주역을 도맡아서 했다. 유라는 초, 중학교와 직업학교를 우등생으로 마친 후 사라토프 산업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1955년 산업전문대를 졸업하게 된다. 전문학교 학생으로서 항공협회(аэроклуб)에 등록하여 항공에 대한 꿈을 키우고 항공협회를 졸업 후에는 자신의 삶을 영원히 항공과 연관시키게 된다.

전문학교 재학 시절 유리는 자신의 일생을 바꿀 과제물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와 그의 학설, 로켓 엔진과 행성간 여행에 대한 리포트였다. 가가린은 이 주제에 관한 매우 많은 서적을 읽는다.

후일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치올코프스키는 내 마음을 뒤엎어 놓았다. 그는 쥘 베른이나 헤르베르트 윌스, 또는 다른 과학적 몽상가들보다 농도가 더 강했다. 이 학자가 말한 모든 것은 그의 개인적 경험이었으며 또한 과학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이 날부터 내게는 하늘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갈망(渴望)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1955년 10월 27일 유리 가가린은 사라토프 시(市)의 옥차브리(10월-역자) 지역군사위원에 징집되어 오렌부르크 시(市)에 위치한 K. E. 보로실로프 제1츠칼로프 군사 항공학교에 배정된다. 비행, 군사 교육, 짧은 시간의 휴식들로 채워졌던 2년의 학교생활은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1957년 10월 25일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졸업한 지 이틀 후 가가린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발렌티나 이바노브바 고랴체바와 결혼한 것이다. 후에 가가린에게 두 딸 엘레나(1959년)와 갈리나(1961년)가 태어나게 된다.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

유리 가가린 이후 운명은 소련의 우주과학의 발전 및 발견과 밀접히 연관된다. 이때는 우주경쟁이라 명명되는 국가들 간의 첨예한 경쟁 시기였다. 설계․과학 분야를 선도하는 학자들이나 우주비행사들의 뛰어난 업적을 바탕으로 한 미사일-우주기술의 발전은 많은 부분 국가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냉전시대의 미사일-우주기술은 로켓-핵 잠재력과 우주패권을 이용해서 세계권력을 장악하려는 선진국들의 대결장이었다.

그러나 우주를 향한 실제 초석(礎石)을 놓은 나라는 소련이다. 1957년 코롤료프의 주도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 R-7이 개발되었고, 그리고 R-7은 같은 해에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제믈랴 (지구) 발사용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 8월 19일 역사상 최초로 지구로 무사 귀환한 생물체를 태운 우주궤도비행이 실행되었다. 소련의 우주선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동반자)-5’ 우주선을 타고 벨카와 스트렌카라는 개들이 궤도비행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최초의 ‘우주 초강대국’이 된 것은,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이 우주선 ‘보스토크(동방)-1’로 첫 유인우주비행을 실행했을 때였다.

 

누가 최초로 우주를 비행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오랫동안 미제(未濟)로 남아있었다. 후보자는 셋이었다. 유리 가가린, 게르만 티토프, 그리고리 넬류보프. 우주비행사들의 훈련에 관한 모든 업무를 총괄했던 공군 총사령관 니콜라이 카마닌은 비행 일주일 전에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똑같은 생각이 집요하게 나를 따라 다닌다 - 과연 누구를 첫 비행에 보낼 것인가: 가가린인가 티토프인가?... 누구를 영원한 죽음으로 내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 만큼 또한 누구를 세계적 유명인으로 만들어서 인류 역사에 영원히 그의 이름을 보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어렵다.”

4월 8일 국가위원회의 비공개 회의에서 가가린 쪽으로 최종 결정을 보았다. 카마닌은 가가린과 티토프에게 출발 3일 전 이 결정을 통보했다.

가가린은 비행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전날에 부인과 딸들에게 다음과 같이 작별 편지를 썼다.

“과학기술을 나는 완전히 믿소. 과학기술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법이오... 하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발류샤 (가가린의 아내) 당신에게, 첫 번째로 부탁하는데 너무 슬퍼하지 말길 바라오. 인명은 재천이라오... 우리 딸들을 보살펴 주고, 딸들을 사랑해주시오.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의 삶을 잘 꾸려나가시오. 양심이 말해주는 대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대로. 어떠한 의무도 나는 당신에게 부과하지 않겠소. 내게는 그럴 권리도 없소. 어쩐지 너무 비장한 편지가 되어버렸소. 나 자신은 이것을 믿지 않소. 이 편지를 당신이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나중에 잠시 동안의 이런 나약함에 대해 내 자신에게 부끄러워지길 바랄 뿐이오.”

그는 그가 사망할 경우에 부인에게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 편지를 지도부에 전달했다. 발렌티나 가가리나는 7년이 지나서야 그 편지를 읽게 되었다.

1961년 4월 12일은 따뜻하고 화창한 날이었다. 우주선에 탑승했던 가가린은 사랑의 음악을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영웅은 겨우 27세였다. 1시간 48분 동안 가가린은 지구를 선회하였고 사라토프 주(州) 테르노프스크 지역 스멜로프카 마을 근처에 성공적으로 착륙하였다. 그의 이름은 전 세계에 유명해졌고 그가 출발 전에 했던 “갑시다(파예할리)!”란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유리 가가린은 자신의 비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우주선 ‘보스토크’로 비행했을 때 처음으로 우리 지구를 지구 밖에서 보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감동적인 장관(壯觀)이었다! 대기권의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행성(行星)이 내 밑으로 지나갔다. 그 위에서 우리 모두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1961년 4월 14일 유리 가가린에게는 레닌 훈장과 ‘황금별’ 메달과 함께 ‘소련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소련 국방성의 명령으로 대위 가가린에게 소좌 특전이 이루어졌다.

1961년 4월 말 유리 가가린은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떠났다. ‘평화의 사명’이라 지칭되던 그의 해외출장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국왕들과 대통령들, 정치 지도자들과 학자들, 배우들과 음악가들은 그를 영접하는 것을 명예(名譽)로 여겼다. 처음에 그는 체코슬로바키아로 향했고, 그 후엔 쿠바, 브라질, 일본, 캐나다, 영국 등을 방문했다.

우주비행사 파벨 포포비치의 회상에 따르면, 처음엔 비행사, 이후엔 지구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된 농민의 아들에게서 영국 국왕과의 공통점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타마라 필라토바는 버킹검 궁전에서 여왕과의 만찬에 관한 우스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식탁에는 포크, 스푼, 나이프들이 어찌나 많던지! 우주비행사들에게 에티켓 강습을 했었지만 그런 자세한 것까지는 그는 알지 못했다. 유라 (가가린)는 이런 모든 식기들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여왕에게 고백했다. 영국 여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도 헷갈려요! 각자가 편한 대로 먹읍시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 최초 우주비행사의 보기 드문 매력(魅力)을 언급하곤 한다. 품위, 감화력, 에너지, 용기, 자제력, 소탈함, 계속된 자기 계발 - 이렇게 그는 대화 상대자들과 친구들에게 비쳐졌다. 소련의 영웅 우주비행사 보리스 볼리노프는 두 번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는 믿음직하고 우정 어린 관계로 맺어졌던 유리 가가린에게는 희귀한 특징이 있어요. 그는 마치 자신의 온화함으로 주위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았어요. 한 번은 그와 몇몇 우주비행사들과 내가 사냥에 초대되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 곳에서는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풍성한 환대가 준비되었었죠. 식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술병이 있는지, 무슨 전시회 같았어요. 유리 가가린은 계속해서 잔을 부딪쳤지만 입만 대고는 식탁에 잔을 내려놓았어요. 수많은 질문들에 대답했고, 재치있게 여러 에피소드들을 얘기해주었지만, 자신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요. 요리들 중에는 가장 맛있는 구운 간 요리도 있었죠. 가가린은 맛보지도 못했어요. 차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내게 간이 맛있었냐고 물어보면서 배가 고프다고 고백했어요. 나는 식탁으로 되돌아가 보았지만 간 요리는 이미 없었어요. 유라가 버스에서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를 가져왔죠... 정말 나는 그의 허례허식 없는 소탈함과 양심적인 성격에 자주 감동을 받았어요. 한 번은 그가 우주복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무거운 텔레비전수신기를 6층까지 끌고 왔었죠 (승강기가 고장이었어요). 지역군부의 군인들에게 짐을 올려달라고 하라고 충고했지만, 가가린은 손사래를 쳤어요. ‘아직 자신은 그런 양반 나리는 아니라면서...’”

<下편 계속>



babo.ivan@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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