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코프 집권 18년 간 모스크바는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심화에 따른 민중 생계의 불안화, 양극화, 실업 문제, 국가 기반 시설 부족 문제, 솟구치는 주택 가격 등 심각한 부작용으로 양극화 사회 문제가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사회학자들은 루시코프 정책 중 특히 투명하지 않은 공직 사회의 윤리도덕 문제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공직 사회의 온갖 추문(醜聞)은 모스크바가 마치 비리의 온상(溫床)이 된 듯 여겨진다.
특히 공직자로서 공과 사를 구분짓지 못한 루시코프의 처사는 자신의 부인 엘레나 바투리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시장의 부인이 2004년부터 포브스가 선정한 억만장자에 랭킹 됐으니 말이다.
1998년 루시코프 부인이 관리하는 회사 ‘인테코’는 재건하는 ‘루즈니키’ 운동장에 공급될 총액 700,000달러 규모의 85,000개 플라스틱의자 공급경쟁에서 어렵지 않게 낙찰됐다. 그 당시 루시코프는 “어느 누구도 그 회사보다 더 이로운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그 사실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밌는 사실은 다른 경쟁 참가사의 이름이 여전히 미궁(迷宮) 속에 있다는 것이다.
2009년 겨울에도 ‘인테코’ 계열 건설사 ‘스트라테기야’가 ‘노동자와 여자집단농원’ 기념탑 재건 입찰권을 따냈다. 2009년 6월 17일, 모스크바 시장은 모스크바은행 설립에 자본금 150억 루블을 배정한 다음, 여기에 모스크바 시가 출자하는 것을 검토하는 2009년 모스크바시 예산 수정안에 서명했다.
그 후 모스크바 은행은 ‘프레미에르 에스테이트’는 회사에 약 130억 루블 규모의 신용대출을 제공했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회사는 모스크바 건설 시장에서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프리미에르 에스테이트’는 바투리나한테서 모스크바 남서부에 있는 58헥타르의 토지를 시장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1헥타르가 7백2십만 달러가 넘었다)인 130억 루블에 구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루시코프의 전횡(專橫)은 도를 넘었다. 2009년에 나온 <루시코프, 결과>, <루시코프, 결과2>라는 보고서에서 민주주의 운동 ‘솔리다르노스치’의 대표 보리스 넴초프와 러시아 사회연합 ‘민주주의의 선택’의 대표 블라디미르 밀로프는 범죄율, 생태환경, 주택문제와 같은 모스크바의 주요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특히 뇌물수수(賂物授受)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다.
보고서에선 모스크바 정부가 여러 결정을 채택하여 바투리나 회사들 ‘인테코’와 계열사들이 부동산의 상업적 이권과 소유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전(前)시장 부인이 수십억 루블의 수입을 벌어들인 원천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루시코프가 인․허가를 내준 ‘인테코’ 제국이 추진하는 건설사업의 면적은 주택과 상업 지구뿐만 아니라 행정시설과 사무실 부지 등을 포함하여 4백 5십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현행법에서는 이와 같은 공무원들의 행위를 이해갈등이라고 한다.(연방법 19쪽 ‘시민의 국가업무’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гражданскоей службе 조항) 이 책자가 발간된 후 Ju. M. 루시코프와 모스크바시 정부는 보고서 중 6개 대목을 반박하며 넴초프와 ‘코메르산트’지에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법정은 6개 항목 중 “밑에서부터 위까지 모스크바 당국 전체에 뇌물수수가 뿌리 깊게 침투했다는 것과 모스크바 관리들에게 있어서 부패(腐敗)의 견본은 바로 유리 루시코프와 그의 아내라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라는 단 한 대목만의 반박을 인정하였고 넴초프와 ‘코메르산트’지가 피고측에 50만 루블을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
엘레나 바투리나도 <루시코프, 결과>라는 보고서 중 5개 대목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법정은 5개 항목 중 “사실은 뒤집을 수 없는 것이다. 모스크바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바투리나의 사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라는 한 대목만을 인정하였다. 보고서 <루시코프, 결과2>가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공개 비판에 연방 당국도 합세하였다.
유리 루시코프는 모스크바와 러시아의 수많은 정치 굴곡(屈曲)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민영화 논쟁에서 추바이스를 이겨 모든 시영(市營) 공장, 건물, 건물 1층에 위치한 상가, 주차장, 호텔, 극장, 학교에 대한 관리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건강상태와 알코올 중독을 이유로 옐친을 대통령 권좌에서 해임시키고자 했던, 1994년 옐친 반대 음모가 적발된 이후에도 루시코프 시장은 버텨냈다.
1995년 봄 블라드 리스티예프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범죄를 파헤치지 못하고 모스크바에서 형사 범죄 상황이 악화된 것에 대해 모스크바 지도부와 경찰이 고소당한 사건과 관련된 법적 투쟁을 겪었다. 자신의 정당 ‘조국-러시아’ 당의 창당과 해체도 견뎌냈다.
심지어 블라디미르 구신스키와의 우정도, 2000년 대통령 후보에 나선 것도, 수십 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2004년 2월 트란스발 파크 참사와 2006년 2월 바스만 시장 지붕의 붕괴에도 그에게 면죄부(免罪符)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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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잃은 채 나락에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루시코프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있다. 탁월한 행정수완으로 모스크바를 공산주의 제국의 수도에서 시장경제의 대도시로 변모케 한 그가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설 수 있을지 비상한 관심이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