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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무용수

글쓴이 : 김기화 날짜 : 2011-03-24 (목) 22:45:11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거울의 형태나 성질에 따라 다르고, 때로는 나의 모든 면을 볼 수 가 없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여성이, 남성에 비해 자신의 얼굴이나 몸을 들여다 보는 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거울 공주’들도 제대로 된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의 모습을 거울의 도움 없이 육안으로 확인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생각해보자. 내 전신 앞면의 상, 하체는 볼 수 있지만 자신의 얼굴과 뒷모습은 확인 할 방법이 없다. 설령, 거울의 도움으로 얼굴과 뒷 모습을 확인한다 하더라도, 머리의 정수리나 몸의 깊숙한 부분까지는 제대로 관찰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타인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내 모습을 보는 것 보다 수월하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심지어 그 사람의 숨겨진 부분 까지도 나의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이 간단한 논리도, 다시금 알게 되는 이 순간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말로써 설명하기 힘든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가’ 더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매 시간 자신의 몸을 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여지는’ 사람들, 무용수(舞踊手)이다.

무용수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자신의 몸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행동은 특별한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행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필수 사항이며 간과(看過)해서는 안될 행동들이다. 무용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 하고 체크하지 않는다면, ‘보여지는 자’(행위자)로서 책임감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무용수들은 자신의 외양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적 에너지의 흐름이나 외부에 대한 몸의 반응과 같은 자신의 몸 안팎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에 항상 주의를 기울인다.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내적 반응을 몸 밖으로 표현해 낼 때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무용수들은 언제나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한다.

  

매주 월요일 뉴욕 소호에 위치한 어느 공연장에 가면 무료로 무용 공연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 공연되는 작품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나리오가 완벽한 것들이 아니다. 각 예술가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를 가져와 작품으로 거듭나기 전의, 말그대로 ‘날 것’의 (raw) 공연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공연을 주관하는 단체는 예술가들의 나이와 경력보다는 아이디어와 실력을 보고 판단하여 공연을 하게 될 예술가들을 선정한다. 따라서 이 곳은 소위, 현대 예술의 트렌드를 읽어낼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장’이 펼쳐지는 곳 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컨템포러리 댄스(Contemporary Dance)라고 불리우는, 요즘 시대의 무용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돌기 Turn , 뛰기 Jump, 혹은 규칙적인 스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무용수가 한 자리에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거나, 어느 하나의 동작을 반복적으로 하여 전체적 작품을 이루어 나가는 등의 다소 이해하기 힘든 장르의 무용으로 전환되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이 공연장에서 몇 주 동안 흥미로운 광경이 연출 되어졌다. 하루에 4-5명의 무용수가 공연을 하는데, 매 주 약속이라도 한 듯이 1-2명의 무용수들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노출하기 힘든 신체의 한 특정 부분을 작정하고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한 주도 빠짐없이 몇 주 동안이나 이러한 형태의 작품들이 올라오는 것이다.

처음에 그 공연을 접했을 때에는 신선함과 경외감, 그리고 많은 궁금함을 자아냈었다. 그러나 일련의 트렌드처럼 몇 주간 지속된 ‘이런 류’의 작품들은 이 공연장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매 주 월요일,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그 공연장을 찾았던 나는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물론, 그 많은 아티스트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유행을 좇아 그런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아이디어나 자신만의 특별한 움직임 연구를 통해 나오는 작품을 기대했던 나와 같은 관객에게는 그들이 호소력을 가지지 못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곳의 객석은 한글 자음 ’ㄷ’자 모양을 하고 있다. 내가 그 공연장을 방문했던 어느 날, 한 무용수가 의상 없이 걸어나와 이 ‘ㄷ’자 모양으로 빼곡히 들어찬 관객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자신의 그곳을 몇 분씩 돌아가며 보여 주는 순간이었다.

당장 그녀를 찾아가,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꼭 벗어야만 했습니까?’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 Jim Kempner Fine Art, Display>

많은 관객들은 숨 죽인듯 고요했다. 당황함을 감추려는 것인지, 이러한 트렌드가 그들에게 익숙하고 잘 이해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작품 속에 내포(內包)된 경건한 의미를 읽어내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누구하나 숨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이 없었음은 분명했다.

나 또한 예술가로서 한 자리에 머무르는 것 보다는 변화하는 것을 즐기며, 내적탐구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그녀가 분명히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있으나, 내가 알아채지 못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직임 하나 하나를 유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행동은 무용관람 초보자가 저지르는 첫 번 째 실수였다. 알 수 없이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그 움직임 하나하나를 뜯어서 분석하려는 생각. 그것은 공연 감상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음악을 들을 때, 도레미파의 각 음계를 따로 이해하려는 시도, 혹은 그림속의 저 멀리 보일듯 말듯한 집이 왜 존재하느냐의 질문들은 무용수의 움직임 하나에 의미 하나를 부여하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음악을 느껴볼까? 가능한 일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무용수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어느 정도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이 방법도 맞질 않는다. 음악이 없다. 음악, 대본, 의상이 없으며,조명도 없다. 말 그대로 초자연적인 상황이다. 기계문명의 노예가 된 인간이, 인간을 둘러싼 모든 억지스러운 것들을 배제해 버렸다. 화려한 메이크업도, 몸매의 단점을 감추어 주는 의상도, 분위기를 연출에 도움을 주는 조명도 없이 가장 ‘내’가 ‘나’ 일 수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이러한 모습들이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진실된 모습일까? 모든 것이 화려해진 이 시대에 진정한 ‘자신’과, 진정한 예술을 드러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부산에서 예술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당시, 프랑스 무용가 한 분이 이 보수적인 도시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모던 댄스를 추었다. 나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이슈였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무대 위에서의 노출(露出)이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무용수가 누드로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무용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관점에 따라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예술행위로 간주 될지도 모르겠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그들의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았던 것처럼, 순수예술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이러한 행위들이 도덕적 개념, 그 이상의 관념일 것이다.

흔히 순수예술은 어렵다고 말한다. 사실 그러한 예술을 하고 있는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작품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순수예술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복잡한 세상사를 늘어놓는 대중 예술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쉬운 것이 순수예술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작품은 너무나도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머릿 속은 정말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짓는다.

그러나 아이들의 그림이나, 음악에 반응하는 그들의 율동을 유심히 관찰해 보라. 그 아이들의 순수한 표현은 추상 화가나 공연예술가들이 표현하는 방법과 아주 유사하다. 또한, 그 아이들의 표현력은 어른들의 생각으로 부터 표출 되어진 것을 능가 할 때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정 반대로, 순수예술을 하는 이들의 마음보다 우리의 마음이 다양한 잣대들로 뒤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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