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다 보면 온가지 그럴듯한 말로 겉꾸민 예술창작에 대한 각종 거창한 기법(技法)을 접하게 되는데, 듣다 보면 세상에 둘도 없는 명석한 의견이며 새 시대에 맞는 무슨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소리인가 ‘시픈’ 말들이다.
그러나, 예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결국 예술을 비롯한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뜻이 통해야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문학을 예로 들어, 다음의 네 가지 예문을 비교해 보면 이 문제에 대한 직관적인 답이 나오지 아니할까 ‘시프다.’
1.
눠 호도풍차가논더머린데롤로 몰
의뭉 피히테씨초고능닉밀지 놓쇼
오디리 억너락돠주기뜨믕 수룩두
베니스서 헝러시안보이 흐끼느네
제게다깔라 우냐누구 엥뎅헤꾸랴
하샤괴퍅 항꼬에날폰나 들롱알랑
저긴으 긍릉드글몽종햐쟈 싸는둥
어허 모깅농론잉올미일옥온 아멘
마 홍노을은그르즈므레와쁘닝 펑
2.
옹갸헤 옹갸헤 오돌돠아
디그른 오걍흔 너나요리
낭쉉끼 릉랑 포묵
꺼이뿍 에체절 넉룽남
음마능 제 걍호 니지지 옪가
너멍 가홍루 도뜬너 믁루.
노도릉 꾀음테 로롷 니오르
즴헌 끼옻 레스전잉 오숙
어닐 리성제 늗룹 리피뤂 로시 아나고니
레나믐 빗룽에 디쓰 다쓰.
옹갸헤 옹갸헤 오돌돠아
디그른 마늘낳이 르누포가푼.
3.
고양이 고양이 더러워 더
구리든 고양은 안 일하냐
땅거미 하늘 뿜고
떡국이 제차례 물건만
바우문 저 고양 진 의지 앙꼬
머언 방구로 떠드는 거름.
어눌도 매 구태 술로 오르니
쉰점 고추 빈정스레 묶고
호린 시들해 물든 졸필의 소리 아니냐고
내말은 입수레 시 짓수다.
고양이 고양이 더러워 더
구리든 한울머니 못부르구나.
4.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든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든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든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4번 예문은 하나의 훌륭한 시, 진지한 예술작품의 경우다 (정 지용 시인의 ‘고향’). 비록 이 시에 나오는 모든 낱말 가운데 어느 하나도 과연 새롭거나 신기한 것이 없으며, 지용 외의 많은 문인, 또 일반대중도 자주 입에 올리는 낱말들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개별적 감수성과 언어감각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참된 예술 작품의 한 예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1, 2, 3번 예문의 경우는 무엇인가? 3번은 얼핏 보면 4번과 뭔가 비스무레한, 시의 겉모습 흉내만 낸 경우다. 거의 말재롱의 수준으로 내용은 말이 안 되지만 사용된 각각의 낱말의 뜻만은 알 수 있는 경우다.
2번 예문은 4번 예문과 각 말마디에 쓰인 닿소리와 홀소리가 같다는 점 빼고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하나의 글자적 시도다. 진짜 시 (4번예문)과 비교했을 때, 말마디의 수가 같고, 각 말마디마다의 소리마디의 수 및 사용된 닿소리/홀소리의 가짓수가 같으나, 기본적 의사소통이 성립할 수 없는 경우다.
1번은 최악의 경우로서, 아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읽기조차 불편한, 공허한 소리의 나열(羅列)에 불과하다.
4번 예문에 쓰인 모든 닿소리와 홀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썼고, 또 일단 사용된 음절은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까닭 있는 원칙, 수학적으로 잘 짜여진 구성 (126음절을 3연 9행, 각행 14 음절로 나눴다는 점, 각 연의 관계도 순차적으로 늘어나는 2, 3, 4행이라는 점 따위), 단어의미를 전제로 하는 기성문학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궤변적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말뜻을 알 수 없기에 그 많은 “독창적” 아이디어들이 결국 무용지물(無用之物)에 그친다. 창조의 전제가 처음부터 어그러졌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부작용(副作用)인 바다.
(1번 예문의 수학적 우아함)
1 12 1
2 10 2
3 8 3
4 6 4
5 4 5
4 6 4
3 8 3
2 10 2
1 12 1
수학적으로 그럴싸한 그 무슨 기법이니 철학이니 가져다 붙인들, 뜻이 통하지 아니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겉돌다 마는 공허한 글자 나열, 소리 나열에 그칠 뿐이다. 예술성은 제쳐놓고라도, 우선 어문의 기본적 성립방식과 표현들이 말이 되어야 한다.
근원적 대립요소인 극적 긴장(緊張)과 이완(弛緩)의 개념을 무시하고 기본적 말의 뜻, 말의 느낌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거창한 철학이 담긴 기법인들 문학적으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주석(註釋)
1, 2, 3번의 예문은 4번 예문 (정 지용, “고향”)에 바탕하여 글쓴이가 실험적으로 만들었다. 3번의 경우 원래 싯구의 각 말마디의 소리마디 수는 같게 하되, 다만 원 시어를 소리가 비슷하게 나는 다른 낱말들로 바꾸어 썼고, 2번의 경우 원 시어를 그대로 이용하되 각 말마디마다 쓰인 닿소리와 홀소리의 순서와 조합을 무작위로 바꾸어 썼고, 1번의 경우 시 전체에 사용된 訓民正音 字母를 일일이 모아 (ㄱ (17), ㄲ (4), ㄴ (27), ㄷ (11), ㄸ (1), ㄹ (26), ㅁ (11), ㅂ (2), ㅃ (1), ㅅ (6), ㅆ (2), ㅇ (41), ㅈ (7), ㅊ (2), ㅌ (1), ㅍ (5), ㅎ (11); ㅏ (16), ㅑ (6), ㅓ (11), ㅗ (24), ㅛ (1), ㅜ (11), ㅡ (20), ㅣ (20), ㅔ (12), ㅚ (1), ㅘ (2), ㅝ (1), ㅢ (1)) 아무러하게나 짝을 짓되, 모든 만들어진 소리마디는 본래 시와 한 가지로 126개로 맞추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마치 한 가지다. 예술성은 둘째 치고, 음악의 기본적 성립방식과 표현들이 말이 되어야 한다. 음악의 극적 대립요소인 긴장과 이완의 개념(불협화음/협화음)을 무시하고 가락-화성-장단이라는 음악고유의 근원적 요소를 배척하는 그 어떠한 현학적 궤변인들 음악적으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안데르센 동화에 벌거벗은 임금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에서 과연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가?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앞에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옷을 입었다고들 너나할 것 없이 떠들어 댄다. 심지어 혼자 속으로는 믿지도 않으면서!
모두가 기억해야할 따끔한 이야기지만, 특별히 예술창조한다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이야기다. 혹시 속으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혼자 시대에 뒤쳐지지 않아야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때문에 동조하는 면은 없는지? 발가벗은 걸 발가벗었다고 말하는 아이의 정직함 없이 무슨 예술을 한다는 말인지.
▲오브리 비어즐리의 삽화 "호수의 여인이 아더왕에게 엑스칼리버 칼에 대해 이야기해주다". 예술의 영감은 엑스칼리버와 같은 면이 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얻으면 엄청난 축복이기에!
“말이면 다 말이냐 말이어야 말이지”하는 격언이 있다. 똑같은 이치라—소리면 다 음악인가, 음악이어야 음악이지! 소음과 음악을 구분할 능력이 없든지 구분하기를 거부하면서 나는 음악가요 하고 나서는 일은, 음식물 쓰레기와 요리를 구분할 능력이 없든지 구분하기를 거부하면서 나는 요리사요 하고 나서는 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리라.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는, 사람의 기본을 거부하는 자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언어의 기본전제를 무시하는 글자조합은 문학이라 인정받지 못하며, 음악의 기본전제를 무시하는 소리조합은 음악이라 인정받지 못한다. 고급이냐 저급이냐는 다음의 문제다. 근본적 전제를 거부하는 존재들이 정당한 존재로 인정받는 사회는, 바꿔 말하면 근본을 지키는 존재들이 업수이 여김을 받는 사회라는 말이다.
상식이 통하는 예술창작의 문화가 정착되기를 기원한다. 감흥이고 쾌락이고 계몽이고 일단 예술의 기본이 지켜지고 나서야만 나타날 수 있는 연고(緣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