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자로 쓴 편지가 뉴욕에 도착했다. 엄마로부터 받기 시작한 편지가 어느새 서른번을 넘어섰다. 말머리에 앞서 붉은 토마토 아래에는 딸의 이름이, 초록빛깔의 사과아래엔 사위의 이름이 적혀있음을 보면서 풋~ 웃음이 터졌다.
푸른 봉합엽서에 또박또박 쓰인 편지를 다 읽고나니 코끝이 찌르르~ 해오면서 동시에 83 세의 엄마가 참 이뻐 죽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위, 딸 정말 보고 싶구나. 세월은 잘도 지나간다. 벌써 산수유,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벌써 3年이 되었구나. 세월을 잡을래도 잡을수가 없구나. 날이 갈수록 몸이 틀린것을 느낀다.
종수는 가끔 100점을 자주 받아온다. 할머니는 상금으로 천원을 준다. 그 즐거움으로 나는 사는것 같다. 날이 갈수록 영리한 것을 느낀다. 세월이 정말 빠르다. 이젠 벌써 9살이다. 특기로 축구, 과학, 피아노, 미술, 깨임방도 간다. 너희들 닮아서 영리한것 같다.
사위, 딸, 아들, 며느리 모두 고맙구나.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3월 25일 엄마가
'운동은 26回'
▲ Woman Figure/2005./잉크와 나무젓가락. 엄마의 고통, 시름, 슬픔, 아픔을 내가 같이 나눌 수 있었음 좋겠다.
그러니까 3년전 이맘때 아버지는 감기증세로 몸이 찌뿌등하다시며 종합검진을 받으러 들어가셨다가 그로부터 한 달 여 만에 영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부모님의 회혼례를 어떻게 치뤄드릴까에 대해 여섯 형제자매들이 의견을 나누던 참에 받은 아버지의 폐암말기라는 선고는 청천벽력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해야 했던 엄마는 ‘느 아버지가 먼저 간게 암만 잘한 일’이라고 담담하게 받아 들이셨다. 옛날분들이 다 그랬듯이 지극히 내외를 하고 사신데다가 아내인 엄마에게 한번도 살갑거나 다정한 모습을 보인적이 없으셔서 그랬는지 그렇게 말씀 하셨다.
게다가 말 수도 적고 무뚝뚝하기 까지 하셔서 그랬을까? 아니면 젊은 시절 아버지의 오점이 평생 잊혀지지 않아서 그랬을까? 장례를 치루는 내내 60년을 해로(偕老)한 부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마는 조용했다. 지아비를 잃은 지어미가 보임직한 예의 대성통곡도 없었고 눈물바람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남편으로서 가졌던 적지 않은 단점들에 대해서 기꺼이 감사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저토록 엄마가 침착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나아가서는 아버지를 빨리 잊고서 엄마의 남은 여생을 자유롭게 사실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 엄마라는 단어엔 풍성함, 풍만함, 푸근함이 오롯이 담겨있는것 같다. 이 그림은 83세의 全再福 여사가 현재 소장하고 있다.
장례가 끝나고 모인 식구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 다음 살아계셨더라면 당연히 회혼례를 치뤘을 혼인한지 60년이 되던 날 엄마와 강원도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회혼례를 대신해서라기 보다는 나도 곧 뉴욕으로 와야 해서 엄마 곁을 떠나야 하는 미안함이 커서 여행으로 조금이나마 대신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경황에 무슨 여행이냐며 다 싫다고 하셨지만 딸이 하도 조르자 마지못해 응하셨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내 말에 대한 응수도 없었다.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만 왔다. 먹자면 먹고, 쉬자면 쉬고, 가자면 가고.....
그러다가 어느 이른 새벽 이런저런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엄마의 서럽게 우는 모습을 봐야 했다. 살면서 그렇게 오래 무너져 내리는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 저윽이 당황스러웠다.
경황이 너무 없어서 멍했던 것을 침착하다 못해 감정이 메마른 담담한 것으로 알았고 자식들 앞에서 안 무너지려고, 그리고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있었음을 부부의 정이 두텁지 못해서라고 여기다니!
▲ 엄마의 색칠하기 그림 책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늘 2개의 점 같은게 붙여져 있다. 나는 그 두개의 점들이 하나는 아버지 이고 하나는 엄마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나는 그때서야 엄마에게 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때임을 실감했다. 스스럼 없는 동네 아낙으로, 비밀을 나눠가지는 여고 친구로, 깔깔대고 웃을 수 있는 어릴 적 소꿉장난 친구로, 서(세)말이나 되는 시집 흉을 맞장구치며 볼 수 있는 그런 먼 친척쯤이 되어 아침밥도 거른채 무려 8시간이 넘도록 긴 이야기를 했다.
엄마에게 일어나는 여러 증상들 망각(忘却), 혼돈(混沌), 더러는 공황장애(恐慌障碍) 같은 증상도 보였다. 하루가 다르게 기분이 오르고 내리고 우울해하고....상황이 심각했다. 서둘러 뉴욕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와 좀 지내다 가겠다고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타국에 사는 자식들이 대개 그렇듯이 혼자 남은 엄마를 두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은 무겁고 죄스러웠다. 마치 어린아이를 떼어 놓고 모질게 돌아서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짝을 잃은 외기러기처럼 먼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엄마를 보려니 못내 안쓰럽고 짠한 마음이 들었다.
주변에서 영감님 떠나보내고 퍽 자유롭게 얼굴 피고 사시는 할머니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우리 엄마도 그럴줄 알았다. 힘들지 않게 잘 이겨내실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자식의 아둔함 자체였다.
▲ 말과 꽃 새알의 조화가 재미있다.
층층시하(層層侍下) 속의 시집살이에서 유달리 내외가 심했던 엄마 아버지는 65세 무렵부터 두분만이 지내게 되면서 속정 깊은 본래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칠순 즈음에서는 엄마를 부를 때 ‘어이’ 내지는 ‘이봐’로 부르지 않고 ‘여보, 당신’이라는 아버지 표현대로 ‘낯 간지러운’ 호칭도 그때부터 쓰시기 시작하긴 했지만 요즘의 표현대로 '사랑은 커녕 좋아한다'라는 그 흔한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셨다.
자식들을 다 내보내고 모시고 살던 시어른들이 모두 떠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두 분은 서로의 처지를 한층 돕고 이해하는 지기로, 동지로, 같은 편이 되어 사셨던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와의 여행들을 통해서 길고 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야 나는 엄마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얼마나 크고 힘든지도 미루어 짐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혼자 남은 삶에 자꾸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갖는 엄마를 위해 뭔가를 해야 했다.
▲ 노란 병아리들 옆에는 예쁜 꽃들로 장식을 한다. 엄마의 마음속에는 늘 화사한 꽃이 있음이리라.
나는 엄마에게 편지쓰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운동한 횟수를 적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대신, 운동을 한번 할 때마다 3천원씩이 적립되는 운동장려금을 내걸었다. 집에서 성당 가고 올때, 동네 노인대학에 가고 올때, 미용실이나 사범학교 동창회 등 가고 오는것 등등을 각각 한번씩으로 계산해서 움직이는 모든 과정을 운동으로 계산해드리겠다고 했다.
우습지만 그리고 유치하지만 엄마의 기분을 바꾸는데 집에서 혼자 덩그마니 방에 혼자 지내시는 시간을 없애야 해서 나름 강구한 방책이었다.
엄마를 운동시켜려는 딸의 가상함을 받아들여 시작은 했지만 편지 받기가 그리 순탄하지마는 않았다. 느 아버지처럼 편지 쓰는 재주가 없다, 평생 안써 버릇 한 편지를 지금 와서 쓸려니 영 어색해서 못쓰겠다, 맨날 무슨 말을 써서 보내냐 며 운동한 횟수만 전화로 불러주면 안되냐고 까지 했다.
‘엄마, 생각해보니 엄마에게 받은 편지가 단 한통도 없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 그러니 지금이라도 엄마 편지를 못받고 자란 딸의 한을(?) 풀어주면 안될까’, 막내딸의 협박성 요구가 엄마를 움직였는지 이후 편지쓰기를 계속하셨다.
그렇게 해서 받은게 아버지 3주기를 맞고 있는 이즈음 서른 한번째가 되는 편지를 받은 것이다. 편지엔 운동횟수 뿐이 아닌 엄마의 동선(動線)을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닌 기분, 그날의 생각, 속상했던 일과, 아버지를 잃은 후의 우울함 슬픔 등이 종합 일기예보를 보는것 마냥 행간에서 다 읽혀졌다.
▲ 푸른 빛 봉합엽서에 써서 보내온 엄마의 31번째 편지. 엄마의 허락 없이 이렇게 공개를 하는것은 순전히 ‘자랑하고 싶어서’ 다.
그렇게 소외감과 인생의 허무함, 세월의 무상함, 상실된 삶의 의미 등으로 점철(點綴)된 엄마의 편지가 반년 전 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그림도 그려오고, 재밌었던 일도 써보내고 하면서 조금씩 밝아지는 엄마를 보았다.
조금씩 늘어나는 엄마의 산책 횟수를 보는 것은 큰 즐거움 이었다. 무엇보다도 귀챦던 편지쓰기가 기쁨으로 재미로 의미로 오고 있음은 말할 수 없는 보람이 되었다.
처음엔 ‘야, 내가 이 나이에 편지쓰는게 숙제처럼 느껴져서 편치가 않다. 맨날 무슨 말을 쓰냐’ 하는 불평이 사라지고 '내가 요즘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지 바빴다. 곧 써서 보낼팅게(보낼테니) 며칠만 기다려라잉. 내지는 이젠 편지를 안쓰면 개운하지가 않고 뭔가 빼먹은 것 같단 말이다. 얼른 써서 부치마.....’ 로 바뀌었다.
엄마는 얼추 3년이라는 세월을 통해서 당신과 딸 자식 하나와 마음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가시고 있는 것 같다. 31번째의 편지를 통해서 손주에게 가는 사랑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노력을 보면서 편지란 받는 즐거움 이전에 쓰는 기쁨 또한 결코 작지 않음을 팔순이 넘어서 당신이 몸소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자랑스럽고 기쁘지 않다.
▲ 작년에 숙제로 준 색칠하기 그림책으로 엄마의 마음을 색깔로 그리고 이야기로 읽어 낼 수 있다. 색칠하기 책에 재미난 그림 딱지를 붙여서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 완성하였다. 딱지의 초록색들은 토끼에게 줄 먹이라고 했다. 그림책에서 조차 엄마라는 존재는 생명을 살리고 기르는 마음이 우선인것 같다.
‘엄마 생신때 갈려고 표 알아보고 있어’ 했더니만 ‘야, 엄마 생일은 관두고 말이다. 느 아버지 제사에 와주면 더 좋지. 안그냐? 느 아버지가 좋아할 것 아녀~ 그러니께 올라거든 그때나 와라잉’
한국을 다녀오면서 생기는 일과 시간적인 공백,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해서 방문 횟수를 줄이고 있던 나는 서둘러 비행편을 예약했다. 아울러 남편의 일년 휴가까지도 끌어 댕겨서 장인어른의 3주기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낌없이 쓰기로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라기보다 살아있는 엄마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어서.
스스로 조금씩 홀로서기를 하려는 가상한 노력을 보이는 엄마를 어서 가서 꼭 안아줘야지..... 그리고 홀쭉하고 헐렁한 엉덩이일망정 툭툭툭 두들겨 드려야겠다.
▲ 제목 Man Figure/2007. 나무 숫가락에 펜. 나는 엄마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게 밥이다. 우리에게 밥은 생명이고 엄마는 곧 우리의 생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