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에 머물던 내내 경이로운 풍경이 있었다. 아이들을 태운 유모차들이 바로 그것으로 평일엔 엄마가 혼자 주말엔 부부가 같이 갓난아이들을 태우고 움직이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북유럽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저렇게 이 날씨에 단련되게 키우는구나 싶어 퍽 놀랍게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잰 걸음으로 유모차를 밀고 간다. 혼자,둘이,가족 단위로....바이킹의 후예들은 추운 날씨에 저렇게 길러지나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하루는 수백년 동안 잠겨있던 배를 인양해서 전시하고 있는 바사(Vasa) 박물관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어른들은 웃으면서 산책을 하지만 추위에 바짝 웅크린 아이의 표정은 심상치 않다.
그 중에서 우리 두사람의 눈을 잡아 끈 이들이 있었다. 그들과 우리는 서로 옷이 닿을락 말락 스쳐 지나고 있었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유모차 속의 이불속의 꼬맹이와 그 유모차를 몰던 아이 아빠 그리고 엄마를 동시에 보았다.
아이 아빠로 보이는 보이는 이는 얼추 보아도 백발이 성성해서 환갑이 훨씬 넘어 보였고 아이 엄마는 아직 서른이 채 못된듯한 젊은 엄마였다. 아이의 생김으로 봐서 그들이 엄마 아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편은 눈이 똥그래져서 ‘정말 한국사람 맞는 것 같아’ 라며 고개를 돌려서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차마 그 부부의 뒷모습을 쫒을 수가 없었다.
▲눈오는 날의 거리 풍경. 건물 외벽이 엷은 노란빛의 겨자색을 칠한 건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주변에서 나이차이가 적지 않은 부부들을 만난다. 상식을 뛰어 넘어선 나이에 부부가 되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솔직히 한국사람 뿐 아니라 어느나라 사람을 막론하고 그들이 아름답게 어울린다고 느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스쳐지나듯 잠깐 본 그 부부를 보면서 그들이 서로의 부족하고 넘치는 부분을 잘 나눌 수 있는 그런 부부라고 느껴졌다.
잠깐의 눈인사조차 나눌 겨를없는 짧은 스침이 전부였지만 그 젊은 아기 엄마가 원없이 아낌과 보살핌을 받으며 사랑 속에서 아무쪼록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었다. 젊은 아이엄마의 눈을 보는 순간 나는 20여 년 전 노르웨이 기찻간에서 만난 여덟살 또래의 어린 계집아이가 떠올랐다.
잘 자랐으면 저만한 나이가 되었겠다 싶은 생각과 더불어 이번 역시도 나는 여전히 염치없고 미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한국사람이었다. 그 아기 엄마를 보면서 ‘잘 커줘서 고맙다’ 라는 소리없는 되뇌임뿐.
▲아이가 둘인 집은 엄마와 아빠가 각자 한대씩 이불에 둘둘 감아서 밀고 가기도 한다.
▲스톡홀름의 알란다공항(alanda airport)을 이륙하고 구름위로 날아오르니 그곳에 태양빛이 있었다. 스웨덴에 머무르는 내내 해는 고사하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맑은 날씨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해가 뜨는 시각 오전 8시경 지는시각 오후 3시반 경. 겨울의 스칸디나비아는 시간배정을 잘해야만 요긴하고 헛탕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기내에서 저 멀리 보이는 맨하탄 마천루 풍경이 반갑다. 마음속의 고향을 다녀오는 길. 정작 고향이란 어디를 말하는걸까?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 발을 딛고 마음을 붙이고 살고 있는곳이 즉, 고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해튼 탈출을 입에 달고 사는 내가 비로소 이곳도 언젠가는 고향처럼 그리워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본 적은 처음인것 같다.
뉴욕에 들어오자마자 날벼락 같은 뉴스를 접했다. 지역방송이나 한국 뉴스를 통해 아침저녁으로 접하는 연평도에 관한 뉴스를 들을 때 마다 전쟁이란 불길한 단어가 사이사이 섞여서 들린다. 국방장관 서리라고 하는 이가 공식적인 발언으로 ‘다음엔 우리 남한에서는 전투기로 대대적인 응징을 하겠다.’ ‘우리 군사력도 막강함을 보여줄 수 있다’ 라는게 요지였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느낌이다.
한반도를 두고 미국 행정부에서 ‘전쟁’ 이란 단어가 들어간 말이 떠올릴 때 마다 간담이 서늘할진대 국방장관이 될 사람이 그런 말을 눈 깜짝 하지 않고 하는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참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북이든 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 사는 땅 아닌가?
▲방금 교대를 마친 왕궁의 근위병이다. 물론, 추운 날씨라는것을 감안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한 나라의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의 자세라고 보기엔 헐렁할 뿐만 아니라 뭔가 2%부족하다.
▲걸음걸이 하나만 봐도 남한이나 북한의 군인 군기에 비하자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보인다.
우리는 해외로 수많은 아이들을 입양을 보낸 참으로 할말 없는 부끄러운 나라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해줄게 없어도 훗날 그들이 원해서 엄마의 나라이고 아빠의 나라여서 언제고 한번쯤은 찾아보고 싶어서 가게 되었을 때 보여줄 적어도 고향이며 나라는 보존해줘야 하지는 않을까?
▲인파라곤 보이지 않는 스톡홀름의 올드타운. 드문드문 여행자들만 눈에 띈다.
남편의 귀향을 통해서 우리는 꽤나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알란다 공항 첫 입국장에서 만난 친절하고도 명랑했던 한 스웨덴 중년 부인 고타(Göta),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스톡홀름의 산 증인인 백발의 카니 에맄손(Canny Eriksson), 자기가 하고 싶은 수집하는 취미를 하고 싶어 황혼 이혼도 감수한 재미난 매그너스(Magnus), 우리를 집으로 초대한 저널리스트 알란다(Alanda),
▲매일 밤이면 핀란드의 작은 섬으로 출발하는 1박2일 여정의 배. 크루즈라기 보다 노인분들의 여가와 여흥을 즐기는 장소라고 해야 맞겠다.
크루즈 배 안에서 만난 금혼식을 치룬 싸바(Sabba) 부부, 스웨덴의 생각을 문제점을 허심탄회 하게 짚어준 똑똑한 젊은 청년 잉게르그, 숙소때문에 고생하던 우리를 흔쾌히 구해준 커리어 우먼 커스틴 보그(Kerstin Borg), 자기 본업을 잠시 접어두고 전통 건물을 데리고 가서 보여준 앤덜스….
▲왕궁에 갔다 나오는 길 남편에게 줄 선물을 샀다. 이름하여 '내 작은 임금님을 위하여'
고향을 느낀다는 것은 역시 뭐니뭐니 해도 사람을 통해서가 아닐까.. 남편이 만난 이들을 통해서 이제 그곳은 막연한 조상의 고향이 아닌 자신의 고향으로 구체화된 곳이 되어 언제든지 부담 없이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다소 무리한 여정으로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지만 남편의 첫 귀향직전은 성공이었고 의미 있고 아름다운 귀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향에 가서 푸근하게 안길 수 있고 또, 고향으로 오는 이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다면 이 아니 좋을까…. 제목. figure croquis 2008/ 편지봉투지에 목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