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뉴욕에 이렇게나 많은 카우보이가 살고 있는줄 몰랐네."
"그러게나 말이야. 뉴욕에는 그 카우보이 하나뿐인줄 알았거든."
얼마전 타임 스퀘어에서 황소타기(Bull Riding)을 관전하는 도중에 등 뒤에서 들린 대화의 한 토막이다. 억양(抑揚)이 독특한 걸로 보아 카우보이가 뭔지 모르는 유럽 관광객으로 보였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일 중요한 관건은 짐 꾸리기다. 짐의 부피가 크고 무거울수록 좋은 여행은 할 수 없음' 이 혼자서 장기간 배낭을 메고 그것도 관광지가 아닌 오지(奧地)를 다닌, 짧지 않은 내 여행이력을 통해서 얻은 철학이다. 그 덕분에 어딜가든 최소한으로 또 단촐하게 짐 꾸리기 선수가 되었다.
몇 해 전 중남부로 2주 휴가를 내어 가면서도 내 짐은 일박이일 출장 다니는 이와 같은 크기의 단출한 가방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동네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짐의 2배, 아니 3배가 넘는 부피의 짐이 늘고 말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모자를 쓴다. 대부분 챙이 달린 일명 야구모자라고 부르는 캡이다. 뉴욕에선 너도나도 쓰고 다녀서 몰랐는데 뉴 멕시코 주나 애리조나는 상황이 달랐다.
많은 이들이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일상적으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뉴욕에선 나름 멋스럽고 실용적으로 느껴지던 캡이 그곳에서는 카우보이 모자의 위세(威勢)에 눌려 형편없이 어색하고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야구단의 로고가 있는 캡은 '뉴욕에서 왔습니다' 라고 광고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 망아지를 모는 카우보이와 카우 걸 벽화
▲ 카우보이들은 담벼락에 낙서를 해도 도시의 낙서와는 다르게 카우보이를 그린다
챙이 큰 전설적인 영화배우 죤 웨인이 썼음직한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니니 태양볕도 막아주고 스타일도 살고 일석이조(一石二鳥)였다. 그런데 그곳의 지역주민들 시선이 알게 모르게 내게 꽂히고 있음을 알았다. 구경 당하는 입장이 된 이유가 외지인이, 그것도 동양인이 보기 드문 곳이라서 그러려니 했다.
▲ 지난 1월 8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불 롸이딩' 에 참석한 죤웨인의 손자가 인삿말을 하고 나서고 있다. 작은 사진은 존 웨인의 영화 ‘수색자’ 포스터
그렇게 다니기를 며칠. 여행일정이 중반부로 치닫고 있는데 행인 몇이서 대놓고 나를 보고 낄낄 거리는 것을 보았다. ‘왜, 뭐가 그리 우습냐?’ 물으니 그들이 내 신발을 가리켰다. ‘지금 막 도시에서 왔네요’를 상징하듯 도시의 아스팔트에나 어울릴 단화가 정말 구색(具色)이 맞지 않는 그림임을 알았다.
여행중임을 잠시 망각(忘却)하고 진흙바닥에도 신고 다니기 좋은 검정색 부츠 하나, 도심에 어울릴법한 멋스러운 흰색 부츠 하나, 70%나 세일 하는 부츠가게를 언제 또 만날까 싶어 집어든 갈색 부츠 하나, 도합 세켤레 였다. 시쳇말로 이런 경우를 ‘지름신이 내렸다’고 하던가!
짐이 두배로 늘었지만 모자와 부츠 덕분에 외부인을 대하는 불편한 시선은 조금씩 누그러지고 지역 주민들과 동화(同化)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모자며 흙 범벅이 된 부츠의 차림새가 멋지다고 양손 엄지를 치켜 올려주는 이들도 있고 더러는 친절하게 미국 어느 (원주민) 부족이냐고 까지 묻는 이들도 있었다.
▲ 카우보이 아이들이라서 그럴까? 흙장난을 하면서도 모자와 부츠는 꼭 신고들 논다
▲ 아이의 그림에서 카우보이로 자라날 수 밖에 없는 주변 풍경이 재밌게 그려져 있다
카우보이 지역을 다니다 온 감흥(感興)이 오래가서인지 뉴욕에 돌아와서도 줄곧 부츠를 신고 다녔다. 아스팔트, 대리석, 콘크리트 위를 걸을라치면 내 부츠는 또각또각 말발굽을 연상시키는 소리를 냈다. 소리도 소리이지만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와의 마찰면이 쉬이 피곤하게 만들었다. 뛰는 것은 물론이고 잰 걸음 조차 힘들었다.
흙 바닥이나, 목초지 위에서 빛이 나던 부츠는 뉴욕 도심에서는 그야말로 불편투성이였다. 그때서야 아, 부츠란 멋이나 폼으로 신는게 아니라 말 위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거나 목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들에게 현실적인 신발임을 알았다.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카우보이들의 부츠에 내 시선이 많이 머물게 되는 것을 느낀다.
▲ 카우보이의 부츠. 말을 타고 박차를 가할 때 꼭 필요한 스퍼스(Spurs)는 말타는 카우보이의 필수품이다
뉴욕의 일상으로 복귀된 뒤 얼마 되지 않아 타임스퀘어를 지나다가 먼 발치서 늘 보던 하얀색 카우보이 모자를 쓴 이를 보았다. 여전히 관광객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세례(洗禮)를 받고 있는 그는 사계절 내내 흰색 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친 것으로 유명한 남자다.
흰색 부츠에, 흰색 모자를 쓰고 기타를 들고 나와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을 같이 찍고, 노래도 해서 받는 팁을 수입원으로 살아가는 타임스퀘어의 명물 '네이키드 카우보이(naked cowboy)'였다.
▲ 타임스퀘어의 명물 네이키드 카우보이 사게절 이 차림인 그의 본명은 리차드 버크(40). by 진민희
그가 영업을 시작했던 즈음부터 봤으니 십 년 째 보는 터라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는데 막상 카우보이들이 사는 곳을 다녀온 뒤엔 왜, 하필 카우보이 모자와 부츠일까? 카우보이 모자를 쓴 '네이키드 쇼 보이(naked show boy)'로 불러야 맞을텐데 싶었다.
저 복장이나 행동이 미국인의 자존심이라는 카우보이들의 위신(威信)이나 명예(名譽)를 사정없이 깎아 내리고 있지는 않은지, 그 이미지를 희극화 하여 우스운 눈요기 감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지난번 뉴욕 시장에 출마한다고 했다가 선거 과정이 너무 복잡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어 하차한다는 희대의 변론을 내놓더니만 10월 초에는 타임스퀘어의 관광객들을 앞에서 2012년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미국 국민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의 출사의 변을 들으면서 사업수완이 뛰어난 한 미국인의 쇼맨쉽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대단히 헐리우드 다운 발상을 두고 방송매체에서는 신이 나서 가십거리로 떠드는 것을 보며 진짜 미국이 아니면 못 볼 쇼 임을 실감했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죠지 부시를 두고 ‘텍사스의 카우보이’ (Texas Cowboy) 라고 비꼬던 별명이 기억났다. 그로 인해서 카우보이란 저돌적이고, 무식하고, 냉정하고, 이기적이고, 타협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팽배(
澎湃)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애리조나와 뉴 멕시코 주의 시골의 목장에서 길에서 만난 일반적인 카우보이들 그 중에서도 미국 원주민을 조상으로 둔 카우보이들은 지극히 겸손하며, 수줍음도 많고, 그러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고, 여성과 아이들을 위하고, 독립적이고, 자연에 대해 외경심(畏敬心)이 가득한 따뜻한 이들이었다.
▲ 로데오 경기를 치루기 위해 모인 작은 미래의 카우보이들
작금의 미국에서 진정 필요로 하는 이들은 값싼 아이디어로 사람의 이목(耳目)을 끌어내어 미국을 구하겠노라 소리치는 쇼맨쉽 보이가 아니라 힘들고 거친 노동 속에서 자연에 대한 감사함이 충만(充滿)한 가운데 동물들 조차도 가족처럼 아끼며 묵묵히 성실히 생활하는 원조 카우보이들의 정신과 역할이 아닐까 한다.
모자와 부츠를 신었다고 해서 다 카우보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미국이란 땅에 컬럼버스가 발을 들여놓기도 아주 오래 오래 전부터 이 땅에는 자연을 닮은 ‘원조 카우보이’들이 미 전역에 있었음을 간과(看過)하지 말아야겠다.
힘 있는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떠올려주는 인물 크로키 2007 한지에 먹 kimchikimny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