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임에도 연말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새해맞이를 하기 가장 매력적이고 낭만적이라는 속설 탓에 몰리는 관광객들을 통해서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
이맘때면 그렇듯 지난 한해 가장 큰 일은 무엇이었는지, 잘한 것은 무엇이며 미진했고 아쉬웠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같은 경우 두루두루 돌아보다가 미친 단어가 ‘김치’ 였다.
올해는 유독 김치와 관련해서 만난 사람들이 많았다. 예명인 ‘김치김’ 덕분에 초면임에도 스스럼없이 가까워지고 나아가 김치도 많이 나누게 되었다. 나를 김치에 대한 조예가 깊은 요리사나 맛의 달인(達人)쯤으로 여기는 해프닝도 더러 있었다.
지난해 3월 뉴욕에서 처음 뵌 김선생님은 경주에 꼭 오라고 했다. 맛보여 주고 싶은 7년 묵은 김치가 있다는 것이다. ‘김치가 그리 오래 묵을 수 있다니?’ 한국에 갔을 때 시간이 주어지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경주였다. 놀라움 반, 기대 반의 7년생 김치가 나를 끌어 당겼다.
꼭꼭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다는 오래 묵은 토종 배추로 짙푸른 겉잎이 많았던 그 묵은지는 갈치가 부드럽게 삭혀진 환상적인 맛으로 입맛을 확 잡아당기는 마력(魔力)이 있었다. 그간 경남 지방의 김치들을 싸잡아 박대한 내 무례를 단박에 일깨워 줄 만큼 깊은 맛이 진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난해 김장 김치도 맛있었지만 7년 묵은 김치는 갈치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만큼 삭아있어 그 맛은 가히 예술이었다.
멀리서 손님이 누추한 곳까지 왔다며 일하다 마시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준 그 따뜻한 환대는 김치를 넘어선 감동 그 자체로 다가왔다.
▲ 간장과 된장 고추장을 손수 담으시는 경주의 김선생님 장독대
얼추 7년된 지기(知己)로 남도 땅 고흥 반도에 새 둥지를 튼 송기자님네 김치도 으뜸이었다. 첫 수확한 배추로 담갔다는 부산 토박이인 혜정님의 담백한 성격을 닮기라도 하듯 소박한 고명이었지만 질박하고 감칠 맛을 내었다. 밥을 두어 그릇 뚝딱 비워낼 만큼 위력적이었는데 그것을 보더니 뉴욕까지 가져가라며 두 포기를 싸주어서 뉴욕 온 뒤로도 두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었다.
▲ 고흥 달금마을에 사는 혜정님 김치 두포기는 서울에서 뉴욕으로 멀고도 먼 여행을 했다.
세번째는 택배 김치. 비록, 포장이 서툴러 얼룩지고 형편없는 모양새로 도착했지만 코 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3년전 한국의 염전(鹽田)에 갔을 때 보내준 영록이 엄마가 보낸 것이다.
소금을 받아서 감사했다며 만들 줄 아는게 김치 밖에 없는걸 연신 미안해하면서 보낸 그 맛은 사람 사는 정을 느끼게 만드는 ‘정 가득한 김치’였다.
▲ 정을 느끼게 만드는 택배 김치를 보내온 수줍음이 많고 겸손한 영록이 엄마
다른 하나는 뉴욕에서 받은 김치로 분위기상 엉겁결에 받은 김치이다. 엄마가 보증을 서준 친척으로 그 여파로 우리 집 경제에 10년 아니 20년 넘도록 악영향을 끼친 장본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난 덕분이었다. 여러가지 복잡다단한 사연이 담긴 김치로 내 손에 들려진 김치였다.
원망이 깊어서 그랬는지 냉장고에 처박아 두고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가 음식이 무슨 죄 일까 싶어 열었다가 놀라 자빠져버렸다. 미움이 큰 만큼 그 맛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호박과 대구를 달여 담갔다는 김장김치는 절묘하였으며 우아하기까지 하였다. 그토록 밉던 도망가버린 빚쟁이 친척에 대한 원망을 어느 한 순간 잊게 만든 ‘미움도 녹이는 김치’ 였다.
▲ 사람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잠시 잊게 만든 김치
최고의 맛과 더불어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버린 일러 최악의 김치 3종 셋트도 있다. 펜실바니아 주 여행하다가 들어간 아시안 뷔페 식당에서 느끼함을 달래기 위해서 반가운 마음에 집어든 그것은 색만 붉은빛이었지 토마토 케첩과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단맛 소스를 대충 섞은듯한 웃기지도 않는 김치였다.
김치의 체면은 물론이고 그 면면을 아주 여지없이 깎아내리는, 한마디로 ‘불량 김치’이자 ‘짝퉁김치’라고나 할까?
두번째 최악은 다른 곳도 아닌 멀쩡하게 생긴 한국식당에서였다. 밑반찬으로 나와 빛깔은 좋았는데 썰어진 모양새가 마치 정신이 나갔거나 술에 취한 사람이 마구 난도질한 영 폼 안나는 생김이었다. 아무리 칼질이 서툴러도, 아무리 바빠도 저러면 안되지 하면서 김치는 김치니까 하고 입에 넣었는데 역할 정도로 쏟아 부은 화학첨가물과 감미료의 범벅이었다.
식당의 수준을 바로 알게 만드는 밑반찬이 김치인데 그런 역겨운 김치를 양심의 가책없이 내놓는 상혼(商魂)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어 황당한 김치는 ‘김치매니아’를 자처하는 뉴욕의 나약(Nyack)에 사는 다니엘이라는 친구가 담궈서 어느날 맛 좀 봐달라며 들고 나온 김치였다. 나름 뿌듯한 얼굴로 한국인의 감정평가 내지는 김치김의 맛 인증서(?) 쯤을 받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맛보는 내내 아찔했던 ‘괴로운 김치’였다.
엉터리로 담그면 김치에서 이런 맛도 생길 수 있구나 싶었다. 이탈리안들이 즐겨 먹는 ‘기름과 절인 짠 멸치’인 앤초비(Anchoby) 소스를 마구 섞어 담았던 것이다. 듬성듬성 잘려진 앤초비가 기름옷을 휘감은 채 배추 사이에 박혀있는 모양새는 한마디로 ‘아니올시다’ 였다. 물론, 맛도 소태만큼이나 짰다.
하지만 한국인이 아님에도 혼자 만들려고 한 성의나 김치에 대한 막연한 사랑을 아낌없이 노출시킨 성의만큼은 높이 사주었다. 더러, 이 친구처럼 김치가 건강식이라고 스스로 연구(?) 해서 담아 먹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담그는 방법이 갖가지인데다 표준이 없고 멸치젓인지 멸치자체인지 헷갈리게 영어로 앤초비(Anchoby) 라고만 표기하는 요리책은 좋게 보아 창의적인 맛, 사실은 엉망인 김치를 만들 뿐이다.
만약, 누군가 이런 맛이 김치구나 하고 접하게 되면 평생 김치를 멀리 하게 될뿐더러 한국 음식을 싸잡아서 외면하게 될 수도 있다.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잡지에 나온 김치 만드는 법은 어쩌면 하나같이 정석이 아닌지 황당할 때도 있다. 그래서 샐러드인지 김치인지 아리송하게 되는 모양이다.
▲ 뉴욕 타임즈 요리 섹션에 '김치 만드는 법'이 실려서 즐거웠다. 하지만 간장을 넣고 만든다는 방법은 황당하기만 했다. 이 레서피를 따랐다가는 빛깔도 맛도 이상한 김치가 만들어질게 틀림없다. 정확한 계량과 기본에 충실한 김치 담그는 방법이 소개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오래전 유럽여행 중에 팔자에도 없는 요리사로 초빙(?)을 받은 적이 있다. 양배추로 김치를 담갔다며 한국인인 날더러 맛을 품평해 달라고 했는데 ‘맛이 너무 딴판이다’ 라고 했더니 그 동네를 떠나기 전 김치를 꼭 담그는 시연(試演)을 해 달라고 했다.
종교적인 성격탓인지 한국인과 한국 음식, 특히 김치를 거의 최고의 음식으로 받들기까지 하던 그 모임은 내게 코미디로 보였지만 김치에 대한 예우(禮遇)와 배우려는 성의는 놀라울 정도였다.
지난 해 뉴스를 통해서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한국정부가 직영하는 고급의 한식당을 맨해튼에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급의 한식 차림으로 몇몇의 뉴요커들을 사로잡는 것도 좋겠지만 작지만 알차고 정확한 정보가 담긴 알짜 한국 음식 아니, 최소한 김치 담는 쉬운 요리책 하나가 뉴요커들에게 더 시급해 보인다.
음식이란 그냥 재료만 가지고 만드는 것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맛은 기본이고 담는 사람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서까지도 전달하는 엄청난 매개 역할을 하는 만큼 그 중요성이 간과되지 않았음 하는 바램이다.
올 해 만난 맛난 김치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김치 하나가 있었다. 이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너무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평소 쓰레기며 재활용품 처리를 도맡는 옆지기가 어느 여름날 재활용 쓰레기를 처리하다 말고 무거워 보이는 뭔가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하얀 플라스틱 뚜껑의 둥근 모양새며 긴 통이 영낙없이 페인트 통으로 보였다. 상기된 목소리와 의기양양한 얼굴 표정으로 하는 말이…..
‘이것 좀 봐. 내가 뭘 발견했는지.’
‘페인트네. 무슨 색이야?’
‘잘 봐봐. 김치야, 김치!’
김치라니? 자세히 보니 분명 상표가 붙은 김치였다. 재활용 즉,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는 곳에서 먹을거리를 주어온 남편을 보자니 할 말이 없었다. 그것도 하필 한국인의 얼굴격인
김치를 주어오다니 일순 기가 막혔다.
‘아니, 누군가가 버린 먹거리를 주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지만 여기 좀 봐. 완전히 밀봉이 되어 있쟎아?’
도끼눈을 누그러뜨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뜯지 않은 상표가 붙은 새 상품이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김치를 버리다니? 자고로 음식을 버리면 큰 벌을 받는 것이라며 쌀 한 톨 조차도 소홀히 하지 말라 배웠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덮개는 정말 완벽하게 밀봉이 되어 있었다. 뚜껑을 여는데 뻥 하니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 소리와 함께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와 동시에 입안에 침이 마구마구 고이는 것을 느꼈다.
‘향’이었다. 냄새라는 표현이 전혀 걸맞지 않는 그야말로 ‘김치의 향’으로 아주 잘 숙성된 발효식품에게서 만이 느낄 수 있는 건강한 내음이 집안을 진동했다.
급한 마음에 속 비닐 포장도 열어 배추 한 잎을 쭉 뜯어서 맛을 보았다.
‘아, 죽이는데~’
김치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기껏 담아봤자 작은 유리병 하나가 고작인 탓에 찌개나 만두는 생각도 못하고 사는 내게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도용(盜用)한 ‘김치의, 김치에 의한, 김치를 위한’ 맛의 향연이 벌어질 것을 예감하게 했다.
보름 아니, 한달동안은 메뉴 걱정 없이 하루는 ‘돼지고기 몇 점을 넣은 신맛이 우러난 김치찌개’로 저녁상에 올리고 ‘바삭한 김치전’을 해서 비오는 날이나 주말 낮을 장식하고 밥도둑 이라 불리는 ‘고등어를 넣은 김치찜’을 만들고 ‘김치로 양껏 소를 넣은 김치만두’를 아주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김치의 원을 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라던가? 누구든 음식을 버린 사람은 벌을 받을 거라던 발견 당시의 마음은 사라지고 최악의 김치와 최고의 김치를 가름해보면서 ‘김치김이 뽑은 올해의 대상’을 그분에게 전하고 싶다.
버린 장소 하나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덕분에 맛있게 알뜰하게 김치요리를 해 먹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덕담 한마디 보낸다. ‘김치의 원을 풀게 해 준 님이시여.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김치에 대한 수많은 종류며, 수식어 그리고 김치 맛에 대한 다채로운 표현들이 많다. 김치를 잘 만드는 요리사와 명인들과 장인들도 넘쳐난다. 그러나 최고로 맛있었던 김치는 아직도 어려서 우리들의 향수(鄕愁) 속에 남아있는 엄마가 담근 김치가 아닌가 싶다. 왜냐면 ‘엄마표 김치’는 해를 떠나서 평생을 걸러 우리에게 최고의 맛으로 길이길이 추억되기 때문이다.
▲ 제목 Red Pepper Color Figure, 2007. 수채물감. 김치를 기억할 때 매운 맛은 물론이고 가장 강렬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붉은 태양초 빛깔이 아닐까?
김치김 kimchikimny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