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일주일 간의 뉴욕 패션 위크가 막을 내렸다. 내가 사는 집이 패션상업지구(Garment District) 에 있어서 십 년 넘도록 패션 위크가 열리는 기간 동안 만큼은 집 주변에서 유명한 멋쟁이 연예인들과 탑 모델 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곤 했다. 친구들은 그게 다 패션 상업지구 속에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特權)이라며 부러워들 한다.
두 해 전 패션 위크가 끝나던 금요일 밤으로 기억이 된다. 운동을 하러 나간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연락도 없이 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거나 늦게 오게 되면 예외 없이 전화를 하던 사람이라 예감(豫感)이 이상했다.
얼추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남편이 들어왔는데 두 팔 가득 뭔가를 잔뜩 안고 들어왔다. 남편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기(上氣)되어 있었다. ‘이 옷들 좀 봐, 이게 그 유명한 아르마니(Armani) 자켓이야.’
‘자다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한다’ 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어 보았다. 그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남편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서 대화체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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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마치고 막 스포츠클럽을 나서서 5번가 대로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큰 흰색 밴(SUV)한 대가 내 옆으로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를 내며 서더라구. 창문을 내리더니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이탈리안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로 이렇게 묻는거야.
“실례합니다. 선생님. 뉴왁 공항으로 급히 가는 참인데 길을 잃었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아, 그래요. 그럼 여기서부터 이 길을 따라…..터널을 통과해서 쭉 가면..” 설명을 해 주고 돌아서는데,
“잠시만요. 저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왔구요. 뉴욕 패션쇼에 맞춰 출장을 왔다가 지금 돌아가는 지아니(Gianni)라고 합니다. 패션쇼에서 사용한 옷 몇 벌을 도로 가지고 돌아가는데 고가의 제품이라 세관(稅關)에서 세금을 많이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느니 선생님 체격과도 딱 맞는 사이즈이고 하니 친절히 길 안내를 해주신 보답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며 차에서 내리는거야.
“아니, 전혀요. 이 정도가 무슨 특별한 친절이라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여비가 바닥이라서 선생님 조카에게 여비를 보태 주신다 생각하시고 조금만 현금으로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요. 나는 겨울 자켓도 여러 벌 있고 마침 운동하러 나온 사람이라 가진 현금도 없군요.”
“공항에 가서 렌터카 반환도 해야 하는데 현금이 필요하고 더욱이 출국이 촉박한지라 가는 동안 누구도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유달리 제 삼촌과 너무 닮은 느낌이 들어서 선물로 꼭 드리고 가고 싶습니다. 절대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 주세요.”
“그럼, 잠깐 기다려봐요. 우리 집이 멀지 않으니 아내하고 이야기 한 뒤 돈을 얼마 가지고 나오라고 하지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어서요. 이 옷은 일반 매장에서 팔면 한 벌 당 최소한 400불 이상 씩 나가는 고가의 옷이지만 어디까지나 선물로 드리는 것이고 그저 작은 현금이 필요해서요. 신용카드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까? 제발, 좀 도와 주십시오.”
차의 뒷 문을 열어 보였지.
“보세요. 딱 이렇게 5 벌 있습니다. 마침, 여성용도 한 벌 있으니 아내 분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지아니라는 청년의 청이 하도 간곡하기도 하였지만 짝퉁 물건은 시계나 핸드백 등에 있다는 말만 들었지 옷에 모조품(模造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터라 믿게 되었지. 무엇보다 그 청년의 표정이 너무 절실했고 본인이 그 아르마니라는 회사 직원이라고 까지 말하니 믿을 수 밖에. 정말 현금이 꼭 필요한 상황으로 보여서 그가 이끄는 대로 몇 블록 떨어진 곳의 현금 인출기 앞으로 안내 되었어.
“300불 이상은 어려울 것 같은데….괜찮겠소?”
“충분하진 않지만 그것만이라도 큰 도움이 됩니다. 뉴욕에 두 달 후 다시 오는데 또 뵐 수 있을까요? 제 이탈리아 연락처입니다.”
“내 명함도 하나 받아가요. 뉴욕 와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고.”
‘지아니’라고 적힌 이름과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진 전화번호 적힌 종이를 잠시 보는 사이 불과 3초 남짓했는데 내가 가르쳐준대로 가지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차를 확 꺾어서 가는 것을 보고 ‘참 이상도 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쨌든 나름 사정이 있는 사람의 옷을 사주는 좋은 일을 한데다 아르마니 가죽 자켓을 저렴하게 구입했으니 나로선 흥분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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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하나씩 비닐을 벗겨 보았다. 막 공장에서 나왔음직한 화공약품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인 쟈켓들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디자인 또한 들어서 알고 있던 아르마니라는 상표와는 너무 차이가 있는 평범한 것도 그랬고 바늘땀이 조악(粗惡)한 것이며 값싼 금장 단추를 가죽옷에 부착한 것을 보면서 아르마니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는가 싶으면서 어쩌면 모조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쳤다.
▲ 크로키 제목 / Man Figure 2008/ 종이에 물감. 수치스러움과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죄가 '사기 죄' 일성 싶다. 모델의 포즈에서 사기를 친 사람의 심정을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 kimchikimnyc@gmail.com
그럼에도 ‘가짜네, 당신 보기좋게 사기 당했네’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평소 옷이란 입어서 편안하고 좋으면 되었지 굳이 고가의 명품 옷에 욕심을 한 번도 내어 본적이 없는지라 브랜드의 상태를 비교할리도 만무하고 옷을 펼쳐 보이지도 않고 번갯불에 콩 볶듯이 순식간에 진행이 되었음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렵고 딱한 사람들이 하는 부탁이나 구걸(求乞)에는 절대 지나치는 법 없이 도우려 하고 자신이 가진 경제적인 여유를 조금이라도 꼭 나누는 사람임을 잘 아는 터에 ‘어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느냐’ 라고 탓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이 흉한 도심 속의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 인적도 별로 없었던 장소에서 현금 인출을 기다렸다가 남편이 건네주는 돈만 받고 순순히 사라져 준 것만을 차라리 감사해 하고 있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진짜 아르마니 옷은 아닌 것 같아’ 하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행동이 미심쩍은게 몇 가지 있었다고 말했다. 헤어지고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보는 사이 그가 쏜살같이, 그것도 자신이 가르쳐 준 방향과는 정 반대로 길을 확 꺾어서 가던 것 하며, 옷을 주겠다고 차 문을 열었을 때 여행용 가방이 없었던 것 등등 아무래도 확실히 속은 것 같다며 화를 삭히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 가죽 옷들이 명품이 아니어도 한 벌에 몇십불 씩은 다 넘을 테고 도둑 맞은 것은 아니니 억울해 할 것도 아니야. 나중에 이 옷 사이즈에 맞는 사람들 있으면 하나씩 선물로 주면 되지 뭐’ 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마무리를 했지만 선의의 친절을 악용한 그 이탈리아 청년이 한탕 했다며 횡재를 즐기고 있을것을 생각하니 괘씸하고 속이 상했다.
이후, 그 옷을 누구에게도 주지 못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도 가죽에서 나는 냄새가 어찌나 머리를 아프게 하던지 그 부피가 큰 옷들을 다 잘라서 버려야 했다. 자르는 과정에서 가죽이 아닌 비닐 옷임을 알게 되었다. 다만, 비싼 수업료를 물어가며 산 거액의 쟈켓이라며 기념으로 그나마 냄새가 덜 나는 검정색 쟈켓을 하나 남겼다.
그 밤의 해프닝이 서서히 잊혀져 가던 어느 날 운동을 하고 돌아온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똑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길목에서, 이탈리아 억양을 구사하는 비슷한 청년이, 한 문장도 틀리지 않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차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을 꼽으라면 그 SUV 차량의 색깔이 흰색이 아닌 검정색 이었다는 것 뿐.
남편은 속으로 기절할 것 같았지만 단순히 못된 한 이탈리안 청년 한명이 푼돈을 바라고 사기를 친게 아니라 조직적인 범죄 집단이 연관되어 있을거란 생각이 들면서 못들은 척 하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고 했다. 우리는 이후 어마어마한 규모의 ‘짝퉁 의류 사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 남편은 운동 시간대도 바꾸고 가는 길목도 바꾸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안 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무조건 경계하게 되고 심지어 길에 누가 길을 묻는 질문을 해도 아예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옷 사기꾼 하나로 해서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도매 값으로 ‘땡 처리’ 되는 풍경(風景)과 다름 아니었다.
엊그제 뉴스에 신분도용, 신용카드 사기, 융자 사기 등 이민법과 연방법을 어긴 중 범죄를 진 죄목으로 자그마치 50 여 명이 넘는 뉴욕 뉴저지의 한인들을 검거했다고 들었다. FBI와 지역 경찰국, 이민국 경찰국, 연방 경찰까지 합세한 3백여 명이 합세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 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그 파장이 어떠할지 걱정이 됐다.
앞으로 뉴욕 등 미국에서 한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달라질 것이며 그렇쟎아도 높은 문턱의 은행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 나아가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도 의심스런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터이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기란 모름지기 그 피해가 직접 당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어마어마한 파장으로 다수의 선한 이들에게까지 미치지 않겠는가.
앞서 소개한 그 짝퉁 옷을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거금(巨金)을 들인(?) 싸구려 자켓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구입한 가장 고급스런 옷이라며 웃는 여유도 생겼다. 이름하여 ‘지아니 아르마니’ 라는 브랜드 이름을 붙여서 말이다.
작년(昨年) 봄 뉴욕 공연을 한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님이 우리 집 저녁 초대를 받아 오셨는데 ‘아이구, 언제 뵈어도 남편 분께서 참 선하시다’며 칭찬을 하시기에 기회는 이때다 싶어 그가 얼마나 순진하며, 선함이 얼마나 이 사회에서 악용되었는지 ‘지아니 아르마니’ 해프닝을 말씀 드렸다. 그 옷에 배인 나쁜 기억(記憶) 때문에 더는 입고 싶지가 않아서 당신의 글을 받고 싶다고 여쭈니 흔쾌히 옷의 등과 팔에 이렇게 써 주셨다.
경계(境界)가 없는 장사익 님의 유려한 필체로 쓰인 ‘봄 꽃 한 송이’ 와 ‘하늘처럼 높고 푸르소서’라는 글을 받고 보니 비로소 그 흉한 기억은 사라지고 대신 그 분의 소리가 담긴 구성진 노랫말이 담긴 옷이 되었다.
행여 그 옷을 입고 나설라치면 한국인 에겐 ‘언제 이런 글을 받았느냐’는 부러움으로, 미국인에겐 디자인이 훌륭하다며 관심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패션감각 넘치는 옷으로 지금은 아까워서 입을 수조차 없는 보물 1호가 된 것이다.
▲ 우리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님이 유려한 필체로 써 준 '봄 꽃 한송이'와 '하늘처럼 높고 푸르소서'. 우리가 가장 아끼는 보물 1호 쟈켓이 되었다. 비록 가죽이 아닌 비닐이라 할지라도. 굳이 브랜드 이름을 붙이자면 '지아니 아르마니' 가 되겠다.
‘짝퉁 명품 옷’을 통해 배우는, 결코 값싸지 않은 교훈은 오래도록 갈 것 같다. ‘조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가 아닌 바로 우리가 만든 브랜드 ‘지아니 아르마니’(Gianni Armani) 는 그렇게 탄생했으며 단순한 옷 브랜드가 아닌 허영심(虛榮心)을 시험 받을 때마다 일깨워 주는 좋은 브랜드가 되어 줄 게 틀림없다.
▲ 뉴욕 타임즈에 실린 '조지오 아르마니' 브랜드 광고. 옷에 대한 허영심이 '짝퉁 옷' 을 양산 시키고 사기를 조장하는게 아닐까 싶다.
17년 간 열리던 뉴욕패션위크의 패션쇼가 올해부터는 미드타운이 아닌 업 타운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그 덕분에 제2, 제3의 지아니 아르마니를 우리 동네 앞에서 만나는 일은 더는 없을 것 같다.
Ciao! Giani. (잘가게! 짝퉁 지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