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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민목사의 신앙칼럼
1991년 총신대학 졸업후 도미,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M.A.) 과정을,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M. Div.) 과정을 전공한 후, 드류대학에서 신학박사(Ph. D.) 과정을 이수하였다. 장로교 신학과 기독교 교육학에서 출발하여, 민중 신학, 여성생태신학, 해방신학, 포스트 콜로니얼 신학을 거쳤고 지금은 동양신학을 연구하며 이민목회와 청소년 목회에 헌신하며 두십자가 신학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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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님과 종놈 사이

글쓴이 : 정영민 날짜 : 2012-02-27 (월) 00:35:33

한자, 칠 목, 스승 사가 합성어인 목사(牧師)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나 교구의 관리 및 신자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는 성직자’를 의미한다. 목사의 영어 약자 Rev. 는 ‘존경 받는 분’이란 뜻의 형용사 ’Reverend’ 에서 왔는데 이는 15세기 이후부터 성직자에게 붙이는 존경을 표하는 통칭이 된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Pastor 는 하나님의 양들을 초장에서 이끄는 목자라는 의미로 우리말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보다 공적인 의미를 가진 Minister(목회자)라는 말과 교권적 권위를 강조한 Clergy(성직자)라는 말도 있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하신 분들도 계실 지 모르겠다. 하지만 목사인 나 자신의 교회적 직책에 관한 성경적 유래와 역사적 선례들을 잘 이해하는 것과 교인들의 바른 목회자관이 기쁘고 보람된 목회를 위한 중요한 기본이란 생각에 이 글을 쓴다.

 

현대교회의 목회자 인식의 문제는 지나치게 소위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발생한다. 목사는 목사대로 자신은 영적 축복권과 저주권을 소유한 안수받은 성직자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하거나 교회 행정을 처리하다보면 섬기는 자로 오신 예수님의 지도력과 동떨어진 권위 오용이나 남용이라는 역기능을 스스로 자행하기도 한다.

교인들은 자신들을 ‘평신도’라고 이해하며 감히 주의 종이 하시는 일 앞에 반대하면 은혜가 되지 않을 뿐더러 주를 위한 특별한 희생과 헌신은 성직자들이니까 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러한 사명앞에 제외 될 수 있다는 근거없는 安住(안주)를 하려 들기도 한다.

교인들은 교회생활은 물론, 출산, 입학, 결혼, 육아, 전직 등 모든 삶의 대소사를 목사에 지나치게 의존한 채 살아간다. 그러다가 혹 목사가 실족하여 넘어지기라고 하는 때면 영락없이 수많은 교인들도 도미노처럼 한꺼번에 시험에 빠지거나 아예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이 발생한다. 모름지기 목회란 교인들을 하나님과 사람앞에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일체의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이 아닐까 생각한다.

Minister라고 번역되는 헬라어원어 디아코노스는 단지 섬기는 자 라는 의미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인데, 당시 식탁에서 시중 드는 일을 한 노예를 칭할땐 둘로스라는 말이 따로 사용되었다. 있었다. 품삯을 받기 위한 일에는 라트레우오를, 공적인 봉사 행위에는 레이트루기오라는 말을 따로 사용했으며 디아코노스의 동사형 디아코네오는 개인적으로 섬기는 일을 의미했기에 Minister 라는 말의 원어에선 단지 “섬기는 자”라는 의미만 알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 성서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LXX)에서의 종 개념은 노예 신분의 헬라 문화적 배경에서는 흔치 않았던 독특한 특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종이란 의미외에 아들이란 의미가 혼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에베드(아들)는 헬라어로 둘로스(종)와 파이스: (아들)로 번역된다. 또한 유대 전통에서는 ‘자원 하는 종’의 신분이 있었는데 이는 전쟁으로 인한 노예신분이 아닌 자유인이 개인적 존경이나 종교적 헌신에 의해 자원해서 된 종이었다. 그러니 유대전통의 자원하는 종을 헬라세계의 종보다는 대가족을 거느린 족장의 제반 가정사를 통괄하는 집사나 청지기로 이해하면 타당 할 것이다.

신약성서를 통해 부각된 세상을 향한 섬김은 섬기러 오신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난다. 이러한 본(one ministry of Jesus Christ)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원초적으로 경험한 원시 초대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부름(many forms of callings)을 통해 역사 속에 시현되어 왔으며 바로 이 “하나됨”과 “다양성”사이의 역동성은 초대 교회를 살아있는 증인 공동체로 겸비시켜 세상변혁의 누룩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참여하게 한 창조적 원동력이었다. 그러기에 한 주를 섬기는 초대교회의 교역인 디아코니아에는 높고 낮음의 차별이나, 계급의 이원론적 구조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오직 ‘부르심(callings)과 은사(gifts)의 구분만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초대교회에는 “사도들”(apostles), “선지자들”(prophets), “교사들”(teachers)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자”, “방언 하는 자”, “기적을 베푸는 자”등 각기 다른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마치 한 몸의 다양한 지체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다(고린도 전서 12장). 사도 직은 주님이신 예수의 지상 사역을 목격한 자들이었고 또한 주님으로부터 직접 “임명” 받은(commissioned)자들이었기에 초대교회에서 보다 독특한 기능적 위치를 가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사도직을 제외한 다른 사역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원시 초대 교회의 카리스마적 사역(charismatic ministry)의 주요한 협력자들이었다. 교회가 점차 성장하며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필요가 생겨나면서 초대교회는 카리스마적 사역자들 외에도 제도적인 사역자들(Institutional ministers)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감독”(episkopos), “장로” (presbuteros) 그리고 “집사”(diakonos)이다.

신약성서 학자들에 의하면 감독과 장로는 많은 경우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들 또한 카리스마적 사역자들과 같이 높고 낮음의 계급적 차별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몸으로서의 구원 공동체였던 초대교회에는 “부르심”과 “사역”의 다양성이 하나님의 宣敎(선교)를 위해 역동적으로 실현 되었던 곳이었다고 하겠다.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다양한 교역의 역동성은 오늘 날 교회의 교권적 성직자 중심주의(institutionalized clericalism)와 목회자와 소위 평신도간의 이분화된 계층 구조에 커다란 도전을 준다. 성직자라는 말인 Clergy는 단지 “제비 뽑힌 사람”이란 뜻의 헬라어 Cleros에서 유래한 말인데 초대교회가 증가된 교역을 위해 세례 받은 자들을 전체 공동체에서 “따로 떼어” 제도적 사역을 전담시킨 전례에 기인하는 용례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신약 신학적 통찰에 의하면Cleros는 “하나님의 백성”(Laos tou Theo)전체를 가르키는 말로 이해한다.

이에 반하여 오늘날의 “평신도’라는 말에 해당하는 Laikos는 1세기 말,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에게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 의미는 오늘 날의 의미와 전혀 다른, 교회 내 특정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역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성직자나 평신도라는 말의 원어적 용례로는 오늘 날의 제도교회의 성직자/평신도의 이중 구조나 성직자의 교권적 특권을 지지하는 어떤 근거도 유추해 낼 수 없다 하겠다.

목회의 교권화는 차라리 주후 2세기 초 시리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시우스를 시작으로 에베소 교회의 오네시모스, 그리고 서머나의 폴리캅 감독들이 자신의 위치를 격상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교회의 머리인 감독이라고 칭한 때부터 시작된다.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면서, 4세기경에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부터는 이러한 목회자 직분의 교권화가 본격화되어 급기야 성직이 오늘 날의 고급 공무원과 같은 일종의 시민봉사직으로 변형됨과 동시에 계급과 신분에서 오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성직자는 “안수”와 “성례전”을 독점하는 특권 계급으로 인준 받은 통치자를 의미 했으며, 교회는 성직자(ordo clericorum)와 비 성직자(ordo laicorum)라는 이분법적 계층구조화되고, 성직자 계층은 신성 불가침의 특권적 영역으로 공고히 된 것이다.

그 이후로부터 성직자를 제외한 신도 전체는 “平信徒(평신도)”라고 이름 붙여져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서부터 밀려나기 시작 했으며, 사역을 독점한 성직자들에 의존하는 피동적이고 무기력한 계급으로 전락 되었다.

이러한 교권화의 역행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극대화 되기에 이르러 소위 “추기경단”(College of Cardinals)이 독점적 교황 선출권을 법제화하면서 사역의 교권화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학에서 보면 이는 본질적 교회사역의 심각한 파괴, 그 자체였다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 날의 목사직은 어디서부터 그 성서적 유례를 찾아야 할 것인가? 굳이 목사직의 전신을 꼽으라면 집사로 번역된 디아코노스직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서 속에서 디아코노스로 소개된 인물들은 “성령과 지혜가 뛰어난” 일곱 집사(사도행전 6:3)을 비롯 하여 두기고(골로새서 4:6), 에바브로디도(빌립보서 2:25), 잘 알려진 젊은 목사 디모데(디모데 전서 4:6)가 있으며 로마서 16장 1절에 보면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가 나오는 데 그녀는 성서에 이름이 기록된 출중한 여성 목사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살펴 본다면 오늘의 교역론을 위한 중대한 본질을 발견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 자신께서 하나님의 아들(Ebed YAHWEH)이시며 고난 받는 종(Suffering Servant) 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점이다. 예수께선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diakonesai)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마가 복음 10:45)고 이 세상에 화육하셨다고 말씀하기도 하셨고, “나는 섬기는 자(diakonos)로 너희 중에 있노라”신 선언 속에, 자신의 사역에 관한 분명한 자의식을 확연히 들어 내셨다.

누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한 가르침에는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누가 복음 12:36-7)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식탁 시중뿐 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는 종 외에는 할 수 없는 일로 규범화되어 성문화 되어있던 발 씻기는 일까지 몸소 실천하시며 섬기는 제자도를 보여 주신 것이다.

결국 신약성서가 보여주는 섬김은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를 종식시키고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신 섬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하겠다. 이는 소위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교역자와 신앙 공동체인 교회전체가 동일한 사역에 동역자로 부름 받아 섬길 때 본 받아야 할 궁극적 신앙의 姿態(자태)인 것이다

 

57년간 존경받는 목회자로 살아오신 한 목사님께서는 목사를 “주의 종님, 주의 종님” 하는 데 종이란 말엔 놈이 어울리지, 님이라는 존칭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신 적이 있다. 요즘 머슴목회론으로 목회자들을 재교육하는 프로그램 광고를 본 적도 있다. 종놈이나 머슴의 가치는 그의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그러니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면 그 자체로도 너무도 영광스런 직임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목회자의 자의식 속에 자신은 영적 축복권과 저주권을 소유한 안수받은 성직자라는 특권의식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화육하시고 죽기까지 낮아 지셨는데 목사가 악의 없는 종놈이란 소릴 좀 듣는다고 그리 심사가 뒤 틀릴 일은 아닌 것 같다.

아직 재정적 독립이 불가능한 오지의 미 자립 교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도심 교회에서 실제로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특혜와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이 소위 “큰 사도” 또는 “유명한 사도”들로부터 자신의 사도직의 정통성을 심하게 공격 당했을 때 그는 참 사도직의 본질(sign of a real apostle)을 “혹독한 편지”(the severe letter)로 불리 우는 고린도 후서를 통해 강력히 변호하였다.

참 목회자를 가리는 試金石(시금석)이 사도 바울에 의하면 얼마나 좋은 학벌을 가졌는지, 얼마나 많은 교인이 모이는 교회를 담임하는 지, 얼마나 설교를 잘 하는 지가 아니라 바로 얼만큼 교역자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있느냐에 따른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신앙으로 인한 박해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 주를 위한 고난은 반드시 신앙상의 고충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이거나 문화적, 또는 정치적이거나 인간 관계적 일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피 흘리기 까지 고난 당하신 주님과 견주어 목회자가 예수 이름으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기쁨으로 알고 한다든지, 남들 좋다고 다 하는 일을 스스로 절제하고 삼간다든지 등의 사소한 일부터 이모양 저모양으로 주를 위해 고생하는지 아니면 목사님, 당회장님, 노회장이라 불리우며 더 많은 대접을 받고 사는지는 자신이 금방 식별할 수 있는 일이다.

소위 평신도라고 불리우는 신실한 주의 성도들이 믿음을 보시겠냐는 종말의 때에 주님의 명한 바를 다 이루고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 저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누가 복음 17:10)라는 진실한 신앙고백이 있는 착하고 충성 된 섬기는 목사 만나보기를 꿈에도 사모하고 있을 때, 목사가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하늘 아래 펼쳐진 그림같은 그린을 누비다가 값비싼 식사대접 당연한 듯 받고만 있다면 주께선 무익한 종놈이라 경을 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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