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허리케인의 시절이다. 플로리다 탐파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재해다. 불행히도 공화당의 악재(惡材)는 자연재해로 그치지 않고 있다.
8월 20일 미주리 주의 공화당 의원 토드 아킨의 인터뷰가 웹사이트에 띄워지며 전당대회를 중단시킨 허리케인 급 정치문제로 확대되었고, 계속 풍속과 방향을 달리하는 태풍 아이색 같이 이 설화가 대선에 미칠 파괴력을 예상키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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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당한(legitimate) 강간의 경우, 여성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임신을 막는 자기방어 조치를 취한다”고 한 인터뷰로 시작되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당한”이라는 형용사이다. 정당한 강간이라? 도대체 어떤 뜻으로 그가 이런 형용사를 쓴 것일까?
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 1월 현 공화당 대통령 러닝 메이트인 위스콘신 주 하원의원 폴 라이언과 함께 아킨이 저소득자 의료보험제도 조항 중 생명의 위험을 받고 있거나 강제적(forcible)인 강간의 경우가 아닌 경우 낙태수술을 보조하지 않도록 하는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현재의 조항에는 “강제적”인 이라는 형용사가 없다.
공화당은 저소득층 의료보험 수혜자들이 낙태보조를 받기 위해 거짓으로 강간을 위장하며 결국은 잉태된 생명을 죽이는 살인행위라는 주장이다. 반면, 약을 먹여 무의식으로 만든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강간을 이유로 낙태찬성론자들은 “강제적인” 이라는 형용사를 추가하는데 반대한다.
결국 하원은 이 강제적이라는 형용사를 제거하는 대신 근친상간(近親相姦)의 경우 18세 미만의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추가조항을 삽입하였다. 이 개정안이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민주당 통제하의 상원에서 저지되어 법률안으로 공포되지 못하고 있다.
아킨의 설화(舌禍)가 안그래도 여성유권자 선호도에서 뒤지고 있는 롬니 대선 후보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으며, 간발의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미국 대선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도 있게 된 것이다.
대선을 코 앞에 둔 한국도 이런 비슷한 문제로 떠들썩하다. 헌법 재판소가 민주주의와 정치권력의 구조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민감한 사안에 대해 교통정리를 하고 나선 것이다. 인터넷 실명제가 헌법적 원리에 배치된다는 평결이다.
▲ 헌법재판소
한국사회가 세계를 리드하고 있는 것이 정보화 시대의 정치혁명이다. 근간의 주요 선거에서 그 결과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헌법 재판소의 판단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판단에 대한 반응도 매우 상반의 극을 달리고 있다.
실명제 채택의 이유는 가상공간(사이버 공간)의 익명성(匿名性)에 있었다. 자신을 숨기고 거침없이 쏟아 붓는 험담과 욕설들로 사이버 공간이 염증을 앓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많은 민주주의 선진국들이 이런 인터넷 공간의 익명성을 헌법적으로 보호하느냐에 다시한번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언론 자유의 원칙이 익명성 공간의 염증을 제거하는 수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합의가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의 대안은 간단하다. 법을 통과시켜 실명이 아니면 담론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자, 한비자의 법가주의적 사고이다. 헌재 결정이 나자 또 다른 법 통과를 통해 익명성을 분쇄하려는 듯 하다.
단언하건대,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을 지지한 헌재의 판단에 대항하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할 것이며, 극단적으로 이 시도가 성공하여 익명적 담론을 막을 법률적인 “정당성”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4개월도 채 남지 않은 대선국면에서 그 법률적 실효성은 담보되지 않을 것이다.
2000년 낙선운동의 학습효과 약발이 떨어졌는가? 우리사회는 현재 소셜 정치 혁명세대의 탄생을 논하는 시점에 이르고 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젊은 유권자들이 승표차가 좁아지는 선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안철수의 룸살롱, 박근혜 후보의 콘돔 등의 비본질적인 이슈로 대선의 담론과정이 낭비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사이버 공간의 필연적 부수물인 무책임한 언행은 원죄(原罪)이며, 실명제의 원칙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신이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동행했던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실명공간에서 배신당했다는 것이 성경 창세기의 핵심이다.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 신은 양화를 구축했다. 스스로를 죽인 후 부활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이 길을 선택할 자유의사를 주었다. 율법으로 악화를 척결할 수 없었던 경험적 고찰의 결론일까?
구태의연한 정치논리로 모처럼 찾아온 사이버 공간 담론의 싹이 꺾여서는 안된다. 헌재의 단호한 교통정리에 성원을 보내며 건강한 대선을 기대하며 지켜보는 가상공간의 유권자들의 눈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