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아이린이 동부를 강타한다는 경보에 뉴욕은 일찌감치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는 뉴스를 들으며 잠든 사이, 겁쟁이 남편은 밤새 잠을 못잤다고 투덜거리는 불평을 들으며 잠을 깼다.
비바람 몰아치는데도 한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난 나를 보고 약간 겁(?)날 만큼 질렸다는 남편에게 “뉴욕시장 블룸버그가 오버했다는 지적을 들을만큼 만반의 준비를 하던데 당신은 왜 발뻗고 자야지!”하고 야유하며 브런치로 오믈렛을 맛있게 먹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暴風前夜)에 몸을 떨며 밤새 나를 서너번 꼬옥 부둥켜 안았다는 서방님말에 “증말? 아깝고 원통해라. 몸으로도 기억이 없네 그랴!” 분통해야 할만큼 나는 쿨쿨 푸욱 잘 잤다. 아까워라. 간만에 나를 꽈악 부둥켜 안은 남편이 생각이 안날만큼 나는 왜 항상 잠을 잘 잘까?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빼먹은 미사니만큼 하느님도 알고 계시겠지?
뉴욕 최초로 대중교통수단이 모두 쉬는 날, 허리케인이 곶감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뉴욕의 모든 아이들이 경험한 날, 잘난 척하던 어른들이 그 잘난 세도가 자연의 위력 앞에서 별거 아니더라고 겸손해 지던 날. 무섭게 몰아치던 비바람이 멎은 것 같아,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보았다.
큰 피해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델파이 근처에 나무가 쓰러져 있고 컬라이 공원에 그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다.
우리 동네가 주택가이다 보니, 아직 인기척 없이 조용하지만 바람이 멎자, 그 새를 못참고 뛰쳐 나온 사람의 그림자는 역시 애들과 연인들이다.

아직도 지하철은 잠겨있고, 평온한 날로 돌아오려면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얼만큼일까를 생각하며 걷는 길목에 흑인소년을 그린 그래피티가 눈에 띈다.
누가 그렸는지 참 잘도 그렸다. 하늘을 향해 앉아 있는 이 소년이 꿈꾸고 있는 세상은 어떤 색깔일까?
호젓한 길을 걷노라니 예전엔 눈에 들어 오지 않았던 버스 정류장도 보이고, 비바람에 큰 나무도 쓰러졌건만, 꽃분홍색깔의 꽃들이 방긋 웃는다.
세찬 비바람에도 견딘 너희들, 착한 미소, 그래서 우리는 너희들을 ‘꽃’이라고 부르나 보다.
그래, 그래, 바쁘다고 뛰어 다니느라 나는 우리 동네에 예쁜 버스 정류장이 있는지도 몰랐고, 꽃들에게 다정히 인사도 못했고, 길 건너 바로 돌아서면 누군가의 꿈으로 그린 소년의 그래피티도 무심히 지나쳤다.
시커먼 하늘 틈 새로 햇살이 비집고 나온다.
우리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퍼진다.
- 하늘 높은 곳에는 천주께 영광, 땅 위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