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경선생이 다닌 경기여고의 추억은 여전히 그와 함께 살고 있다. 그가 마시는 커피의 머그에는 경기여고 동창회인 '경운회'의 마크가 찍혀 있고, 식탁위에는 엊그제 여고동창이 보낸 동창회에서 찍은 사진이며, 우편물이 놓여 있다.
그래서 그는 의친왕비로부터 받은 원삼과 치마, 저고리, 그리고 귀한 장식품을 기꺼이 경기여고에 전부 寄贈(기증)할 수 있었다.
한: 사진을 보니 경기여고를 다니실 때, 스케이트를 타셨네요.
▲ 경기여고 스케이팅 선수시절
이:.경기여고의 겨울 체육시간은 스케이팅이었습니다. 제가 그 시간을 너무 좋아하고 열심히 연습한 결과 1946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올림픽대회에 출전할 선수를 선발했는데, 2명의 경기여고 대표 중 하나로 뽑혀서 춘천 소양강에서 출전했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어요(웃음). 처음에 스케이트를 배울 때, 어머니가 궁궐 밖으로 나가서 타면 남자들과 어울리게 된다고 염려하셔서 비원의 주함루 앞에 있는 연못의 눈을 쓸고 혼자 스케이트를 탔어요. 나중에 혼자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어렵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친구들과 창경원 연못에서 탈 수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한번은 창경원 연못에서 경기여고 스케이트대회가 있었는데 스케이트대회를 보시러 어머니가 연못의 수정각에 나오시자 전교생이 일제히 고개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경기여고 졸업생가운데는 아직도 그 때 그 광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선생님이 20세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왕가의 피난생활이 궁금합니다.
이: 국가의 보조금으로 근근히 살던 우리 가족은 전쟁이 일어나자 밖에서 사시던 아버지가 궁으로 들어 오셨어요. 그나마 나오던 보조비도 끊어 지고, 먹을 것이 없어서 어머니가 제 혼수감으로 마련해 주신 비단을 들고 동대문시장에서 팔아 식구들을 부양하기도 했어요. 피난생활은 너무 복잡해서 이루 다 말할 수없지만, 9.28수복이후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고종황제의 후궁 두분, 운현궁의 할머니, 아주머니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서면에 있던 범어사의 포교당에서 지내셨어요.
저는 오공군 찬양대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 사령관의 트레일러를 타고 대구에 갔다가 나중에 부산에 가서 식구들을 만났어요. 그 많은 식구들이 한 방에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 의친왕비는 방에 빨래줄에 가리개를 치고 주무시더라구요. 저는 도저히 그렇게 살 수가 없어서 부산 시내로 나와 친구가 하는 다방에서 의자 4개를 부치고 잠을 자며 지내다가 그 때 저를 찾아 온 생모를 따라 대구에 가서 살았어요.
▲ 생모(김금덕)와 함께
한: 3살 때 헤어진 이후, 생모를 보신 것은 그 때가 처음이신가요?
이: 그렇지는 않아요. 13살 때, 생모를 화신상회에 만났어요. 그 때만해도 의친왕비를 빼고는 모든 사람들이 제게 존댓말을 하고, 다른 형제들의 생모들도 그들의 친자식에게까지 존댓말을 하던 때라, 제게 “잘 있었냐?”하며 반가이 내 손을 잡는 생모를 보고, 다른 생각은 없이 ‘왜 내게 반말을 하지?’하는 생각을 했어요.
생모는 경성보육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어요. 보험회사직원으로 일할 때, 아버지 의친왕과 만나셨고, 아버지의 배려로 궁 안의 형제들의 보모로 일할 때 저를 낳았지요. 제가 5월생인데, 제가 태어난 바로 다음 달인 6월에 아버지는 일제로부터 ‘공’이라는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끌려 가셨어요. 생모는 3살까지 저를 키우시다가 아버지가 계시는 베뿌라는 곳으로 아버지를 찾아 갔어요. 성격이 급한 생모가 아버지에게 소리소리 지르고 대드는 바람에 화가 나신 아버지가 생모를 한국으로 쫓아 보내시면서 아이인 저만을 뺏고, 생모는 궁출입을 금하셨어요. 생모는 한 때 여성으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기도 했을만큼 활동적인 분이셨어요.
한: 생모의 여걸다운 면모를 이해경선생님도 물려 받으신 것같아요. 선생님에게도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이: 글쎄요…분석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활달한 생모의 성품이 제 안에도 있겠지요. 하지만, 생모의 활달함이 궁에서 자란 저에게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이신 의친왕비의 꼿꼿하고 절제된 몸가짐과 겸손한 성품에 익숙했던 탓인지 지금도 나서서 소란떠는 일이 거북해요. 그런데 대부분의 일을 솔선해서 할 때가 많습니다. 서삼릉에 버려져 있다시피한 아버지의 묘를 금곡릉(현 홍유릉)에 있던 어머니의 묘와 合葬(합장)하는 일이 힘든 일이었는데 문화관광부에 탄원서를 넣고, 가족들이 十匙一飯(십시일반) 돈을 모아 1996년에 합장했어요.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었는지 두 분의 묘를 합장하고 나서는 제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한: 예, 저도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상대방에게 쓰시는 일관된 선생님의 경어체, 그리고 바른 자세로 앉아 계시는 모습에서 의친왕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선생님의 어린시절에 영향을 주신 의친왕비를 친어머니로 여기시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죠.
▲ 의친왕비의 말년 1963년. 미국에서 김동환신부님(김수환추기경의 형님) 편에 보낸 50달러로 이방자여사를 처음 만나는 날에 입으실 한복을 지어 입으셨다.
이: 그래서 저는 아이들의 교육에는 기른 사람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너는 누구라고 거만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겸손해라”는 말씀을 생활철학으로 삼을만큼 제 자신을 돌아 볼 때 가장 으뜸이 되는 말씀으로 새기고 있죠.
뉴욕=한동신특파원 dongsinhahn@gmail.com
▷ 사진촬영=백평훈감독
2001년 도미하여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전공하고 순수미술과 멀티 미디어의 관계를 실험하는 감독이다. 인간의 ‘순수’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영상작업을 하는 그의 작품은 Tribecca Cinema, Paramount Theater, Chelsea Cinema, MOCA Museum, Flea Theater등에서 상영되었으며, ‘Korean Independent Film Festival,’ “Asian-American Film Festival”과 같은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Body language가 주는 정직한 언어에 강렬한 영감을 받아 “Bodylogue’라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
<下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