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가 작품의 제작과 동시에 주목을 받게 된다면 매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셈이다. 쉬운 방법은 사회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일이다. 한마디로 핫한 이슈를 다루면 화제가 되고 홍보에 결정적 도움이 되며 이는 곧 흥행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연극이 허구가 아닌 사실에 근거한다면 그 화제성은 배가(倍加)된다.
이 같은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하는 창작자는 그 이슈의 민감성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한 관점을 웅변(雄辯)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으려면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고 그 객관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사실 여부에 대한 입증이 필요하고 과장됨 없는 타당한 논리 위에 공연으로서의 가치, 예술적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
지난 8월 9일 막을 내린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 컴포트 우먼(Comfort Women)은 위에서 언급한 흥행의 유리한 조건을 모두 갖춘 작품으로 공연 전부터 화제가 됐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역사적 사실을 두고 외교적, 정치적으로 여전히 첨예(尖銳)하게 대립하고 국제적으로 주목 받고 있으며 한국인들은 물론 양식 있는 일본인들조차 일본 정부의 뻔뻔스런 입장에 공분하고 있는 이슈가 위안부 문제다. (물론 ‘양식 없는’ 한국의 저명인사들조차 일본 극우들을 대변하는 예도 있지만 말이다.) 뮤지컬 위안부는 출발부터 화제의 중심에 서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작가이며 연출가인 김현준이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라는 사실은 ‘미숙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어린 나이에 저 정도면’이라는 관대함 모두가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공연에는 관대함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 역시 관대한 시각을 전제로 뮤지컬 <컴포트 우먼>에 대해 평해보고자 한다. 공연 예술의 평에 있어 그 작품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의와 예술적 완성도는 결코 분리 평가될 수 없는 항목들이다. 그러나 ‘학생 작가/연출가’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치욕(恥辱)이며 오늘날까지도 정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을 용감하게 건드린 점과 예술적 완성도를 분리해서 평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관대함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지점에 해당된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겠다는 용기가 한 젊은이의 역사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면 그에 따른 ‘주목과 화제’라는 혜택은 축하할 일이다. 작품에 있어서도 위안부 피해자의 진술에 근거해 문학적 플롯을 구성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즉 책임 있는 창작 행위를 했다는 방증(傍證)이다. 대부분 이런 작품의 경우, ‘실화’ 자체가 워낙 극적 요소들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 굳이 ‘허구’를 보태지 않아도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적 소재가 된다. 그러나 공연의 가치를 위해 또 감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작가의 상상력이 추가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다만 허구의 추가가 실화의 진실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 난제다. 허구가 실화를 뒷받침할 만큼 논리적이어야 하고 개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점에서 뮤지컬 <컴포트 우먼>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실화를 다루는 작품으로서의 첫 번째 난제를 해결했다는 평을 하고 싶다.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도 논리적으로 무리 없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됐다. 예를 들어 주인공 고은(미건 리 분)과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민식(가렛 다케타 분)의 만남도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양념처럼 흔히 삽입되는 ‘러브 스토리’의 한계를 무난하게 넘어섰다. 상투성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젊은 작가답게 넘어섰음이 보였다.

다만 작가가 연극적으로 볼거리를 만들기 위해 창안해 낸 장면들에서는 무리수가 드러난 점이 아쉽다. 연극에서 전체의 장면들은 비록 그것이 희극적 휴식(Comic Relief)을 위해 고안된 것이어도 다른 장면들과 '유기성(有機性)'을 가져야 한다. 오해가 없어야 할 점은, 연출가 또는 작가가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 반드시 문학적 유기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뮤지컬 <컴포트 우먼>이 문학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형식의 공연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부분 역시 최대한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은 문학적 유기성이 아니라 연극이 공연예술로서 갖는 장면 상의 유기적 맥락이라는 사실이다.
작가 또는 연출가가 하나의 장면을 구상할 때 분명한 의도를 가져야 하며 그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평가를 스스로에게 내려야 한다. 통일성을 깨는 장면이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희극적 휴식’은 없느니만 못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얼굴에 일장기를 그려 넣은 배우가 욱일승천기를 든 무용 장면이나 ‘나니’라는 인물이 혼자 노래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무엇을 보여 주려는가 또는 어떤 효과를 달성하고 싶은가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이 설정되지 않은 장면은 설득력을 주기 어렵다. 결과에 대해 냉철한 평가를 스스로 내렸다면 일장기를 얼굴에 그리고 욱일승천기를 흔드는 무용 장면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고발하겠다는 착상(着想)이 다른 장면들과의 맥락에 인위적으로 보이는 흠집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인물 나니를 통한 ‘희극적 휴식’도 웃기기 위한 의도를 들키면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연극계에서 흔히 하는 말로, ‘잘되면 배우 탓이고 못하면 연출 탓’이라는 말이 있다. 연출가에게는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속설은 타당하다. 무대에 드러나는 존재는 배우이고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연출가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연기는 연출가의 영역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에 책임일 져야 할 사람은 연출가라는 점에 대해 부인할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연기 뿐 아니라 무대에 올려지는 모든 것들이 연출가의 책임이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배우의 책임이다. 그러나 못하는 연기를 무대에 올라가게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연출가의 책임이다. 잘하게 만들든지 아니면 잘하는 배우를 쓰든지 양자 간 택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연출가다. 연기의 불균형이 뮤지컬 <컴포트 우먼>에 대한 첫인상이기에 하는 말이다.
연기는 재능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훈련을 요하는 창작 분야이다. 성악가가 성악 발성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하고 발레리나가 발레의 기본 동작을 훈련 받아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인공 고은 역의 미건 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듯했지만 내재된 잠재력을 보여줬으며, 이민식 역을 연기한 일본인 배우, 개럿 타케타는 핍박(逼迫)받던 한국인의 모습을 비교적 진실 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영순 역의 이은정의 연기도 특기할만하다. 이은정은 동포 사회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낯선 이름이 아니다. <Half a World Away>, <Reasons to be Pretty>, <Julius Caesar> 등에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고 극단 MAT의 한국어 창작 뮤지컬, <엄마 엄마>에 출연하면서 뮤지컬 배우로서의 역량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 바 있다. 장면의 당위성 결여, 플롯상의 느슨함 또는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산만해지는 분위기를 능숙한 배우가, 자신이 그 장면에서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 낼 때 관객들의 시선을 다시 붙들어 오는 효과를 종종 보게 된다. 유일하게 영어와 한국어 대사를 모두 맡은 이은정이 <컴포트 우먼>에서 해낸 일이 바로 그것이다.
<컴포트 우먼>의 장면 구성에 관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이 ‘듣는 예술’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연출가들은 ‘보는 예술’로서의 연극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문학의 시녀(侍女)가 아닌 공연으로서의 연극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는 일종의 추세를 넘어서는 연극 예술가들의 사명과도 같이 여겨져 왔다. 그러다보니 시각적인 장면 구성의 중요성은 그만큼 큰 비중으로 자리한다.
연극성(Theatricality)을 노출시킨다는 의도는 보였지만 너무 낯익은 방법으로 진행한 장치의 전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시각적 요소들의 평범한 나열(羅列)로는 독창성을 달성하기 어렵다. 연출 상의 장면 구성이 독창성을 잃었을 때 평론가들은 기호학적 또는 조형적 원칙에 충실하기라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는데 <컴포트 우먼>은 바로 이 같은 아쉬움을 자아냈다.
일본군들의 한국인 위안부 여성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장면이 과연 '무용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무용적으로 처참함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하고 충분해야 한다. 그 치욕의 고통이 충분히 보여져야 한다. 만일 안무가가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무용’을 포기하는 것이 타당하며 연출가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단됐어야 할 문제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절대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일은 없어야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용적이거나 조형적인 표현에 처절함이나 참혹함 대신 아름다움의 흔적이 남게 된다면 그것이 피해자들에게 또 그 심각성을 깨달아야 할 관객들에게 모두 치명적인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비단 <컴포트 우먼> 뿐 아니라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에 임하는 창작자들에게 반드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이 공연의 홍보물에서 발견되는 브로드웨이 진출에 관한 얘기들이다. 오프브로드웨이 연극은 브로드웨이 진출을 꿈꾸는 예술가들의 전초기지(前哨基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브로드웨이의 스타 시스템과 흥행 지향의 공연에 반기를 들고 예술성과 연극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하는 연극 예술가들에 의해 주도된 연극 운동이다. 오프브로드웨이조차도 브로드웨이의 문제를 답습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느낀 연극 예술가들이 연극 본연의 예술성을 찾기 위해 더 급진적인 창작행위를 주도하게 된 것이 오프오프브로드웨이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고 말이다.
연출가 자신이 이런 언론의 과장을 조장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묵인하지 않는 것’은 기획, 극작에 연출까지 맡았던 김현준 연출가가 했어야 할 일이다. 패기 넘치는 기획으로 의미 있는 공연을 만들고자 했던 젊은 학생 연출가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젊은 예술가의 역사의식으로 기획되어 화제를 낳고 그만큼 홍보상의 효과도 창출해 낸 아이디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진지하게 접근해 피상적이거나 가볍게 다루는 우를 범하지 않은 작가적 노력은 칭찬 할 만하다. 예술적 완성도를 비롯한 몇 부분에서 보완해야 할 문제들 또한 노출한 공연이었으나 이는 다시금 연극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의 작품이라는 관대한 시각으로 돌아가, 발전의 기회와 시간은 충분하다는 희망론(希望論)으로 매듭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