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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임의 뒷골목 뉴욕
중앙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뉴욕대학 대학원에 유학, 미국의 유명 광고회사에 취직해 미국동포 소릴 들으며 산지 17년. 기자로 출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공연기획자, 또 구멍가게 주인으로, 그것도 모자라 연극 연출에 자유기고가로 사는 자유인. 그럼에도 불변하는 한 가지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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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랑해요

글쓴이 : 앤드류 임 날짜 : 2011-05-19 (목) 02:54:07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엄하고 정돈된 아버지의 모습이 친구분들과 술 한잔을 기울일 때면 늘 명랑하고 장난스러워 보였다. 아버지의 학창시절에 대한 자랑은 정작 어머니를 통해 더 많이 들었다. 당시에는 수재(秀才)들만 다닐 수 있었던 고등학교를 나오셨다든지 친구들이 참으로 훌륭한 인품을 가진 분들이라는 얘기들….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분들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저녁과 약주를 드시는 날은 내게도 흥분되고 들뜨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으셔서 친구들을 기다렸고 우리 네 남매는 어머니가 준비하시는 잔치 음식들을 먹느라 핀잔을 들어가며 부엌을 들락거렸다.

굳이 잔치 때가 아니어도 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뵐 수는 있었다. 친구분들을 초대했을 때 아버지는 그 분들을 직책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내가 친구들을 부르듯이 아버지는 이름으로 호칭하셨고 그 분들도 격의 없이 부르셨다.

 

엄하고 어려운 아버지도 어린아이같이 들떠하며 학창시절로 돌아가던 때요, 대기업, 학계, 법조계, 의학계 등 각 분야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던 친구분들도 장난스런 고등학생들로 되돌아가 행복해 하던 때가 바로 그 저녁식사 때였다.

-호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대학입학후 아버지의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분인 교수님의 저술을 읽고 존경하게 되었다. 모교 교수님은 아니지만 언론과 미디어 관련 저술들을 읽으며 아버지의 친구가 아닌 학자로서 존경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그 분을 ‘모 교수’라고 부르셨지만 사석에서는 그냥 이름으로 호칭하셨다. 학생들인 우리에게는 존경 받는 학자를 격의 없이 부르시는 모습이 속으로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자주 그 교수님이 아버지의 친한 벗임을 자랑했다. 공부에 신경 쓰는 친구들에게는 내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자랑이 얼마나 요란했으면 그 분 학교의 학생인 친구의 친구 녀석으로부터 학점을 잘 좀 말해달라는 청탁까지 받았을까. 그러나 아버지도 어려운데 그 친구분께 무슨 염치로 학점 구제를 부탁드린단 말인가.–

아버지와 동창분들의 잔치 중에 기억에 남는 하나가 있다. 그 날도 예외 없이 아버지는 우리 네 남매를 호출하셨고 친구분들 앞에서 노래를 시키셨다. 4남매 중 막내인 나는 아버지께서 가장 선호하던 ‘사대부고 9회 동창 모임 전담 가수’였다.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를 옆 방에서 듣고 잘한다고 칭찬해주시던 아버지는 아마도 자식 자랑을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정말 내 노래가 친구분들 듣기에 괜찮았을리는 만무하다. 아버지의 아들 자랑을 웃으시며 넉넉한 마음으로 봐주셨음에 분명하다.

그 날도 아버지는 늦은 시간 친구분들을 배웅하면서 나를 대문 앞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마지막 손님이 가신 후에도 아버지는 한참을 대문 앞에 선 채 이런 말씀을 되뇌었다. ‘아빠 친구들 좋은 분들이다. 참 좋은 친구들이야…’ 친구분들이 떠나자 갑자기 쓸쓸해지신걸까. 이태리 가곡을 부르시고 친구들에게 걸죽한 농담(弄談)을 하시던 아버지가 늦은 밤 쌀쌀한 날씨속에 옛 추억들이 잠시 떠올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 밤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아버지와의 추억 하나가 만들어졌다.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올려 어깨에 무등 태우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아버지가 약주를 많이 드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와의 유희(遊戱)가 그냥 즐겁기만 했다.

나는 그런 식이었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다. ‘그 때는 어렸다’는 말이 어찌 핑계가 되겠는가.

돌연 아버지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나도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전혀 아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직 아버지가 걱정이었다.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를 흔들며 소리쳤다. 할머니께서 중풍(中風)으로 쓰러지신 후 어른들이 쓰러지는 일에 대한 공포 같은 게 있었던 듯 싶다. 아버지가 약주를 많이 드신 생각을 못하고 철없이 좋아하다 깜짝 놀란 그 때나, 어떤 고통과 그리움을 안고 사셨는지 돌아가신 후에야 깨닫고 눈물 흘리는 지금이나…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자라지 못했단 말인가….

몸을 일으킨 아버지는 내 얼굴을 잠시 보다가 “들어가자” 짧은 한마디를 하셨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가신 후에도 나는 한동안 방 앞에서 두분의 대화를 들었다.

“…홍주 녀석이 내가 걱정이 됐던 모양이야. 내가 넘어지니까 울면서 나를 흔들어 깨우려고 그래…. 무슨 스트로크 같은 게 왔는줄 알고 말야. 내가 쓰러지기라도 한 줄 알았는 모양이지. 녀석 같으니….”

아버지의 목소리는 흐뭇함이 배어 있었고 저윽이 감동하셨다는걸 알 수 있었다. 막내아들이 당신을 걱정한다는 사실, 그 당연한 사실에 새삼 감격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녀석들아 아버지 절대로 안쓰러진다. 여보 나 절대로 안쓰러져.”

아버지의 호기로운 혼잣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버지 안 쓰러지시는구나. 걱정할 것 없겠구나.’ 그 혼잣말을 그냥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 말씀이 기실 너무 힘겨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엄청난 노고와 중압감으로 살고 있다는 뜻임을 몰랐던 것이다. 나와 가족을 위해 치르는 아버지의 희생(犧牲)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그 날 밤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린 내가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올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공포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 아버지가 없는데 따른 감당 못할 슬픔을 가정하고 상상할 수 있게 해준….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희석(稀釋)되었다고 생각한 그 공포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도 여전히 내 안에 잠복(潛伏)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상실감과 허무함에 대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형언 못할 어마어마한 슬픔이 30년 동안 내 안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감당 못할 기운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경험했다. 고개를 흔들며 털어내 버리고 싶던 그 무시무시한 정신적 충격을, 상상 속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겪어야만 했다.

 

아버지께서는 지병(持病)을 얻은 후, 먼 이국 땅에서 걸려오는 내 전화를 늘 기쁘게 받으셨다. 워낙 철두철미하게 사시려는 분이어서 시간대가 다른 곳에 사는 아들이 행여 일에 방해나 받지 않을까 예민하게 신경쓰는 것이 역력했다. 틈날 때마다 인터넷의 메신저로 말을 걸어 몇마디를 하고는 서두르듯 대화를 끝맺으셨다. ‘바쁠텐데 일해라’하시며. ‘지금 안바빠요 괜찮아요’ 하면 비로소 긴장을 풀고 즐거워 하시는 모습이 보이는듯 했다.

메신저로 타이핑되는 말씀 속에서 어린아이 같은 기쁨과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낚시 얘기를, 가족들 얘기를 줄줄이 풀어 놓으셨다. 마지막으로 전화 통화를 했을 때, 아버지는 우셨다. 내가 또 아버지의 절실한 그리움을 자극해 놓았던 것이다.

“제가 사는 미국의 동부는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물이 있으면 거의 반드시 고기가 있어요. 동네 산 계곡에서 송어도 심심치 않게 나와요. 강가나 계곡가, 또 가까운 바닷가를 지날 때면 아버지 모시고 저기서 낚시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아버지가 친구분과 낚시가실 때 절 데리고 가셔서 끓여주시던 라면도 기억나고…. 몸 좀 좋아지시면 여기 오셔서 한번 가요 낚시. 아버지의 낚시 노하우를 좀 더 가르쳐 주셔야죠…”

내가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대신 수화기 너머에서 아버지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애써 울지 않는 척 하셨다. 젖어 있는 목소리로 아버지는 애써 이성적인 척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러셨다. 아버지가 슬퍼하시는 걸 알면 먼 곳에 떠나 사는 내가 괴로워할 것을 아주 민감하게 신경쓰셨다.

“똑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구나. 나도 너랑 낚시나 한번 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하면서 살아 이 놈아…너하고 배타고 낚시갔던 일… 그런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살아 이 놈아...나만 보고 싶은 줄 알았더니 너도 아버지가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진정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나는 결국 이 세상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아버지를 울게 한 것이다.

 

그때 나도 형언 못할 슬픔에 울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펐고 아버지가 그리워 울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일년반 전에 만나 나를 꼭 끌어안고 흐느끼셨다. 전에는 나를 안아주시던 아버지께서 그 때는 내게 안겨서 우셨다. 내가 자랐기 때문이 아니고 아버지가 작아지셨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기침이 날까봐 밖에도 못나가고 낚시는 상상도 못하신다며 아끼시던 낚시대며 릴이며 주시던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아버지를 뵈었을 때, 아버지는 중환자실 병원 침대에 호흡기를 입에 넣고 누워계셨다. 14시간을 날아 와 병원으로 바로 달려 온 막내 아들을 의식이 없으셔서 보지는 못하셨다. 그런 아버지께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을 귀에 속삭였다.

“울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일어나실 거니까 저 울지 않아요. 아버지. 힘드시죠? 조금만 참고 지난번처럼 일어나세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 자랑스러워 하는 거 아시죠? 제가 아버지 존경하는 거 아시죠? 아버지 사랑하는 거 알고 계시죠? 막내 왔어요 기운 내세요.”

아버지는 눈을 약간씩 움직였을뿐 여전히 눈을 감고 계셨다. 그리고 몇시간 후 숨을 거두시기 전 나는 점점 맥박이 희미해져 가는 아버지께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아버지 제발 일어나세요. 버티세요. 아버지 제발요.”

허공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눈에는 이미 촛점이 없었다. 아버지의 영혼이 이미 육신을 떠나셨음을 알 수 있었다. 숨이 멎기 전, 이미 아버지는 떠나고 계셨던 것이다. 다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지금 하느님 하시는 일을 수긍할 수 없었다. 순명(順命)하고 싶지 않았다.

내 절박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않으셨다. 오래 전 친구분들이 떠난 잔칫날 밤, 나를 무등 태운 채 중심을 잃고 쓰러지셨던 때처럼, 다시 일어나 내게 ‘나 안쓰러져 이 녀석들아’하고 호기 있게 외치시지 못했다.

이미 영혼이 떠나신 아버지의 몸에는 아직 온기가 있었고 나는 그 아버지의 얼굴을 매만지고 감싸안으며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간절하게 애절하게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아직 따뜻한 아버지에게 울부짖으며 토해냈다. 사랑한다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제발 내 말 듣고 가시라고, 들으셨냐고 내 말 들으신 거냐고 말이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일상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버지만 안 계실 뿐이다. 가끔씩 울리던 전화, 전자음을 내며 떠오르던 인터넷 메신저의 아버지 얼굴만 없을 뿐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웃겨드릴 수도 없고 공연히 낚시 얘기를 꺼내 숨이 가빠하시던 아버지께 ‘낚시 노하우 전수’ 열강을 하시게 할 수도 없다. 비즈니스에 대한 충고도 이젠 들을 수 없다. 무엇보다,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자랑스러워 하는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말씀드릴 수가 없다. 내가 아버지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세상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제발 나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여러분의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러분을 위해 충심으로 하는 권유다. 나처럼 떠나시는 아버지께 고백을 하고 그분께서 그걸 마지막 순간에 듣고 가셨는지 평생 궁금해하며 가슴 태우지 않기를 권한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그 궁금증과 그로 인한 상처는 훨씬 크고 깊어서 견디기 어렵다.

진작에 들려드렸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 털어 놓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말을 들으셨는지 말씀을 안해주시고 떠나신다. 한마디만 해주고 가시라고 묻고 싶다. 미칠듯이 그 대답을 듣고 싶다.

‘그래 들었다. 네 말 들었어 그리고 이제 안다 네가 날 사랑하는 걸.’ 아버지의 한마디를 듣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 궁금증이 주는 괴로움은 심지어 아버지께서 먼저 가신 곳에 따라가서 묻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할 정도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듣고 눈물 흘리며 기뻐하실 한마디를 쑥스러워서 또는 그 어떤 이유로 아낀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또 그 어떤 이유로 아버지께서 듣고 싶어하시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려드리지 않는다면, 아버지께서 보고 싶은 여러분의 얼굴을 보여드리는 데 인색하다면…. 여러분은 나처럼 아플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은 단순한 슬픔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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