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애들과 함께 아침을 서둘러 먹고 짐 정리하기에 바빴다. 쓰지 않는 물건들과 쓰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데에 정신없이 오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 중요한 부동산 일까지 하느라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먼길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가는 코스는 미리 지침을 받아 둔 뒤라, 편안하게 찾아 갈 수 있으리라는 부푼 기대를 갖고 말이다. 시속 120~140km로 1시간30분을 달렸을까.. 거의 목적지에 왔다고 생각될 즈음 아뿔싸, 마지막 이정표를 착각한 것을 알게 됐다.
들어가지말아야 할 곳으로 하필 들어간 황당함도 잠시, 해도 지고 어둠컴컴한 흑인촌(村)에서 긴장과 두려움을 안고 3~40분을 헤매다가 간신히 돌아나올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남방의 참고래가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서 짝찟기와 새끼를 낳기 위해 몰려온다는 허마너스(Humernus)다. 고래 축제와 고래 투어로 유명한데 허마누스, 허마네스라고도 발음한다. 이 곳은 수 년 전에 한번 와봤지만 그때는 지인도 없고 초행(初行)이여서 힘들었던 기억 밖에는 없다.
허마너스는 고래축제가 열리는 9~10 월이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배를 타고 고래에 접근하여 고래가 뿜어내는 물살을 맞는 짜릿한 경험을 하거나 바다가 보이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앉아 여유롭게 와인을 즐기며 고래가 유영(遊泳)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다.
마을에는 고래가 나타나면 나팔을 불어 알려주는 '웨일 크라이어(whale crier)'가 있다. 아름다운 하이킹 코스도 유명해 말을 타고 해변을 돌거나 바다를 배경으로 골프를 즐기는 등 평화로운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에서 2시간정도 거리에 있는데 N2를 타고 가다가 R43으로 갈아타서 남쪽으로 한참동안 내려가면 도착하게 된다. 이렇게 쉬운 길을 예전에 왜그렇게도 고생을 했는지, 아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림책에서나 봄직한 아름다운 마을과 허름한 마을을 번갈아 몇 번 지나쳤건만 목사님이 일러준 이정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한인들이 살 만한 마을은 거의 지났다고 생각할 즈음, 우리가 찾는 이정표 ‘호스톤(Hawston)’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허름한 마을이었다. 그래, 이런 곳에서 묻혀서 선교를 하실 분이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 멀리서 목사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목사님의 큰아들 다빈이(6학년)와 딸 다은이(4학년), 그리고 막내아들 다준이(1학년). 반가왔다. 오랫동안 헤어진 가족처럼…. 몇 시간을 헤맨 탓일까. 몇 번 뵙지 않았던 목사님 가족이건만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길을 잃은 뒤로 내 핸드폰이 울리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아름다운 허마너스의 뒤안길에는 버림 받은 흑인들과 가난한 컬러들이 삶의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어찌보면 생산도시, 소비도시, 관광도시 어느 하나도 선택 받지 않은 케이프타운의 빈민층보다 더 찌들리고 궁핍한 삶을 영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여기 사람들은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한지, 길을 잃은 나에게 심지어 걸인(乞人)조차 친절하게 설명 해주는 모습에 잔잔한 감동이 몰려왔다.
곤궁한 그들의 삶을 공유하며 치료해 주는 아름다운 사람.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봉사를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목사님은 지역 신문에 단골로 등장할만큼 지역사회에 알려진 분이기도 했다.
목사님이 사는 렌탈(월세) 하우스는 그나마, 동네에서는 좋은 집에 속했다. 운치 있는 분위기에 실속있는 방들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도 집 주인은 선교사도 아닌 목사님이 선교를 한다는 것에 저렴한 렌트비에 집안의 물건들을 아낌없이 배려해 준 모양이다. 하나님의 종에게 은혜를 베풀어 아름답고 좋은 집을 허락해 주신 것 같아 방문한 우리들도 행복했다.
목사님은 영화배우라 해도 좋을 외모와 훤칠한 키에 친절함, 따스함, 여유와 인내를 품고 있는 분이다. 누구라도 저음(低音)의 상냥한 목소리에 빠질 것 같다. 그런 분이 아프리카에서도 척박한 이 가난한 흑인과 컬러들의 마을에 묻혀서 복음을 전하고 삶을 열어 가는 것이다.
▲ 남아공 신문에 실린 목사님 가족 기사
45세, 김경환 목사님은 한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대학교 담임목사님으로 시무했다. 그리고 남아공 스텔렌보쉬대학 설교학 박사학위를 마쳤다. 남아공의 스텔렌보쉬 신학대학교는 세계적인 신학학교로 유명해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이 유학을 온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교수직을 넘볼 경력이건만 귀국하지 않고 남아공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친언니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병환중인 언니는 마치 특명을 내리듯, 목사님을 잘 모시라고 유언처럼 이야기한다. 까다로운 언니가 칭송을 아끼지 않았기에 만나뵙기 전부터 목사님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제와 봉사 주간에 다리밑 교회에서 영어로 설교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을 때 흑인마을을 향해 바라보는 눈빛이 참 따스했고 어색하지 않은 영어에 아주 쉽게 설명을 해주어 알아 듣기도 편안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목사님이 사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은 곧 한국을 방문하는 목사님께 인사를 드릴 겸 흑인주민들에게 나눠줄 물건들도 있었기때문이었다.
우리가 오는 날 목사님은 마을의 Barry Stanley 목사님과 Desmond Samuels 목사님과 함께 미팅중이었다. 함께 외식을 하려고 했는데 이미 송선아 사모님이 저녁 준비를 다 마친 터라 다음날로 미루고 식사를 함께 했다. 마침 시장한 터라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두분 목사님들은 밤 10시가 다 되어서 떠났고 그제서야, 목사님과 사모님 함께 밀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이 Social worker(사회복지)의 일환으로 Child Welfare(아동복지) 아이를 위해 같이 하루를 보내는 날이라고 한다. “내일 우리 가족과 함께 산을 갈 수 있겠느냐”고 베리(Barry) 목사님이 나에게 물어봤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차일드 웰페어 행사는 사회 복지(Social Worker)에서 주관하는 일이지만, 워낙 많은 숫자가 대기 상태여서 자리가 나올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만 18세 이하로 부모와 가족, 친지가 없는 아이, 또는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있거나 기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심어주고 도와주는 주는 일을 한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통해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계획이라는 말씀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합류하기로 했다. 이틀뒤에는 스포츠 펀 데이(Sports Fun Day)라고 시장도 참석하는 큰 행사가 마을에서 열리는데 그 중심역할을 목사님이 준비하고 있었다. 일정관계로 참석할 수 없는게 안타까울뿐이었다.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다 눈꺼풀이 반이 감기고서야 내일을 기약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눈을 깨니 목사님은 벌써 나간 상태다. 차일드 웰페어(Child Welfare) 아이들과 산행할 펀쿠르프(Fernkloof) 지리에 밝은 베리(Barry Stanley)목사님과 미리 약속이 되있었다. 우리와는 자연보호구역인 펀쿠르프( Fernkloof nature reserve) 입구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 허마너스 시내의 야경
<하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