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가 난 그 해 7~8월쯤에, 나는 대통령을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 집에 왔길래 베란다에서 접대하는 장면이었다. 남편은 이명박을 좋아하지 않아.., 반기는 자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한국에서는 대통령 꿈을 자주 꾸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아공에 온 이후로 꿈을 꾸어 본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해 10월에 부동산 앤의 협조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나는 두 달치 렌탈피를 양쪽으로 부담해 가면서 론데보쉬, 자카른다 플랫을 잡았다. 론데보쉬로 이사하고부터는 메트릭(대학입시)인 큰딸과도 마찰이 없었다. 학교를 모두 도보(徒步)로 하게 되었고 별로 부딪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막내인, 상연이만 나랑 같이 운동 삼아 걸어갔다.
너무 행복한 날들이였다. 정말 상쾌하고 쾌적한 기분 그 자체였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라는 말이 이 말이 아닐까. 이전 칼럼에 이런 글을 썼다.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온듯한 따스로운 햇살의 커피 한잔...”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남아공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마치, 올무에서 풀려난 듯한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대통령 꿈을 꾸었다면 앞으로 더 좋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일까. 새 집으로 이사 온 이래로…,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렸다.
둘째 딸, 수빈이는 남아공 가라데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고 막내아들 상연이는 체스 남아공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까지 가는 행운을 안은 것이다.
그리고 큰 딸은, 의대는 아깝게 떨어졌지만 한국인은 단 두 명만 합격할 정도로 치열한 분야인, 엑츄리사이언스에 합격을 했다. 지금은 수학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리고 나는, 사교육비라도 벌 생각에 푸드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비즈니스에만 올인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도 당시엔 말을 안했지만 그 무렵부터 사업을 시작했던 것 같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니 입시생 둘째 딸 뒷바라지를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수빈이는 남아공 최고 명문인 UCT 법대와 정치외교학과에 동시 합격을 했다. 나의 비즈니스는 처음엔 두군데로 시작했지만 도저히, 집안 살림이 되지 않아 학교 납품(納品)하는 것만 2년째 운영을 하고 있다. 작지만, 스태프 둘을 데리고 일한다.
그래도 남편 없이 혼자서 하기에는 벅찬게 사실이다. 작년에 남동생 부인인 올케가 와주어서 여러 모로 많은 도움이 되었고 또한 이국 생활에서의 외로움도 다소 해소(解消) 된 것 같아 고마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툼은 정말 많았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올리고자 한다. ^^
현재, 우리 집은 케이프타운에서 제일 좋다는 학군, 론데보쉬에서도 가장 비싼 렌탈피를 내는 집이 아닐까 싶다. 바로 직전의 집이 케이프타운에서 인구밀도가 제일 높았다면., 지금은 그 반대이다. 처음 이사 올 때 애들이 이 집에 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너무 행복하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남편이 와서 보았는데.., 역시나 꽤 마음에 들어 한다. 집에 하자(瑕疵)가 없고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 매입하자고 조용히 입도 맞추었다.
주변 사람들은 4년 가까이 살았던 클레어먼트 집에 대해 이제야 말을 한다. 집이 어두웠고..뭔가 음침했다는 것이다. 왜, 그때는 말을 하지 않고 꼭 뒤로 가서 이야기 하는지.., 말하기가 괜히 미안했나? 둔한 나에게 직접 말을 해주면 얼마나..좋았을까. 그러면 좀 더 일찍 판단 하는데에 도움이 되었을텐데..
지금에 와서 생각이지만, 그 집에 들어 간 후로 좋은 일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집에 들어 간 이후로, 항상 피곤했던 기억이 나고..그래서인지, 애들에게도 짜증을 많이 냈다, 특히 큰 딸에게 그랬다.
한국에서도 안좋은 일들이 생겼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남아공에 오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집이 2채, 상가 1채를 갖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 왔다. 남아공에 오면서 미용실을 하는 세입자가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경매에 들어가게 됐다. 남편은 회사 일에 올인하니.., 챙기지 못했다. 재산이 많든 적든간에 관리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인데…, 내 명의로 되어 한국에서 법정 싸움을 해야하기때문이다..,
한번은 한국의 언니가 통화중에 “경자야, 너 남편에게 신경 좀 써라”고 한다. 전화를 하는데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애들이 남아공에 다 갔는데.., 왜 그런 소리가 나는지...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니에게 부탁을 했다.
“언니, 혹시 언니가 직접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언니, 고맙지만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에게 말을 하지 말아. 설사 봤다손 치더라도..,절대 나에게 말을 하지 말아줘..”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로 어떠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의심이 생기면 믿음이 깨지고. 결국은 이혼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이다. 애들 공부 때문에 유학을 온 상황에서 부부문제가 불거지고 커진다면 죽도 밥도 아닌 실패의 유학생활이기 되니 말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뭔가의 결과를 갖고 움직여야 하는데, 절대 그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축해버렸다. 언니는 이후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주변의 기러기 엄마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엄마들은 “당장 짐 싸서 한국에 가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하는 등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어이없어 했다. 몇몇 엄마들은 나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 집에서의 악운(惡運)은 불 나기 전까지..계속 되었고 마치, 내가 무너지기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마다 오뚝이같이 일어나면., 다시 넘어뜨리고 못 일어 날 때까지., 자빠지게 하고 넘어뜨리게 만들려는 악마의 장난 같았다.
그러나 론데보쉬, 자카른다로 이사한 후, 푸드 비즈니스는 생계를 떠나 내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고 새 삶을 찾아준 변화였다. 많은 사람과 만나고 그 인간관계 유지와 관계 속에서 다시 나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남편과 떨어져 있을지라도 비즈니스를 통해 자신감과 희망으로 다시 꿋꿋하게 살아 갈 수 있었다. 내 본연의 성정(性情)을 찾았고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 올 수 있었다 .
그리고 남편이 지난 7월, 남아공을 방문했다. 우리 부부가 2년반만에 상봉한 것이다. 그간의 힘든 고비와 시련.., 남편이 있는 열흘동안에 그 동안의 목마름을 풀 수 있을까., 또 다시 떠난 남편의 빈 자리를 보며 참았던 눈물들이 와락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잘 참아 왔는데.., 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또 흘러 내리는지.,나도 모르겠다. 마치 모아 두었던 곗돈 마냥, 모두 쏟아져 버린 것이다.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 약해진 듯하다.
어쩌면 남편의 노고(勞苦)에 감사하고 감동스러워서일지도..모른다. 남편은 내가 걱정할까봐 말 하지도 않고 비즈니스를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 부부가 함께 할 미래를 위해 2년만 더 참자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을 다니자고 한다. 꿈 같은 이야기이다. 내 천성은 노는 과가 아니라., 일하는 과인데 과연 그렇게 될까 모르겠지만 남편의 꿈에 희망을 걸어본다.
기러기 엄마 생활도 머지않아 끝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고, 그간의 힘들었던 고됨이 희망으로 바뀌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글을 통해서, 그때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교수님, 제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 또한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었을 주위의 많은 사람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