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벗님들께 보내는 마흔여섯 번째 편지
벗님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본격적인 신록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역시 5월은 계절의 여왕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숲속을 찾았습니다. 제가 ‘모네 호수’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숲속의 호수는 벌써 파란 수련 잎으로 뒤덮여 연꽃이 만개(滿開)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수에는 모네의 작품 ‘수련’에 나오는 것과 같은 둥근 아치형 다리 밑에 수십 마리 백조들이 헤엄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여간해서는 찾기 어렵고 미국에서도 이렇게 수십 마리 백조가 무리지어 노니는 것은 보기 드믄 광경입니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 발길을 숲속으로 향했습니다. 겨우내 황량한 속살을 드러내 쓸쓸했던 숲도 나뭇가지에 물이 올라 제법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2주일 가까이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다 이제 걷기 시작해 모든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주변 가까이 숲속도 있고 해변도 있는 자연환경이 축복받은 느낌입니다. 코로나 대유행시절에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하는 하느님이 저에게 주신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은 백신 1차접종 2억5천 만 명으로 인구대비 70%가 넘고 2차접종까지 마친 사람도 1억 1천만 명으로 인구의 30%나 되지만 코로나는 여전히 매일 5만 명 전후 새 확진자가 발생해 누적 3,300만 명으로 인구의 10%를 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백신으로 코로나를 종식(終熄)시키는 것에 비관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백신접종이 이뤄지고 있지만, 백신에 의한 ‘집단면역’ 달성이나 완전 종식은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미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토착화되고 여러 종류로 변형되어 지구상에 존재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독감처럼 해마다 백신을 그해 변형에 맞게 만들어 정기적으로 접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신과 치료제만 제대로 개발된다면 인류는 코로나와 함께 공존해도 지금과 같은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긴 미국도 매년 독감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백신이 광범위하게 접종되면서 방역에 대한 경계심이 무뎌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존스비치 해안을 산책하는데 평일임에도 백여 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백사장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채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산책하던 노인들이 질겁하며 눈살을 찌푸립니다. 이제 날씨가 더워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 눈에 보이듯 뻔합니다.
지금 코로나와 함께 미국을 열병처럼 휩쓸고 있는 또 다른 현상은 ‘아시아인 증오’입니다. 지난 해 미국은 미네소타주에서 발생한 경찰 가혹행위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죽자 ‘Black Lives Matter'(흑인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열풍이 전역을 휩쓸었는데 올해는 ’Asian Lives Matter'(아시아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트럼프가 코로나는 중국이 미국에 고의적으로 퍼트린 바이러스라고 주장한 후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중국인과 용모를 구별할 수 없는 한인들도 테러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백인들보다 오히려 흑인들이 앞장서 아시아인들을 공격해 흑백 양측의 테러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아시아인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노인들의 피해도 상당히 많이 보도됩니다. 저도 낫선 곳을 산책할 때는 호신용으로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나가기도 합니다.
엊그제도 볼티모어에서는 한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에서 저녁 늦게 문을 닫는 순간 한 남성이 갑자기 들이닥쳐 여성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머리를 짓누른 뒤 들고 온 벽돌로 머리를 내려칩니다. 다른 여성이 달려와 저지하자 이 여성도 벽돌로 내리치고 두 사람이 힘껏 문밖으로 밀쳐보지만 남성은 아랑곳 않고 얼굴을 가격했습니다. 사투 끝에 간신히 남성을 가게 밖으로 끌어내고, 주변의 도움으로 상황이 끝났지만 두 여성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고 머리를 25바늘이나 꿰맸습니다. 같은 날 뉴욕에서도 한 흑인여성이 지나가던 대만계 여성 2명에 접근해 마스크를 벗으라고 위협했고 응하지 않자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휘둘렀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여성은 상처를 일곱 바늘이나 꿰매야 했습니다. 같은 날 신문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경찰은 이 사건들을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로 수사하고 있습니다. 한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몸이 완전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늘 가던 해변을 산책하는데 평소 마주치면 눈인사만 나누던 백인 할머니가 요즘 왜 보이지 않느냐고 말을 걸어옵니다. 몸이 아파 며칠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했더니 생뚱맞게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를 묻습니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아시아인들은 요즘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왜 그러냐고 반문하니 몰라서 묻느냐며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몰래 미국에 들여와 나라가 이 모양이 아니냐며 분노를 표시합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Trump's country is coming soon.” 트럼프 대통령의 나라가 곧 다시 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중국을 호되게 응징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쩌다보니 그녀와 함께 주차장까지 걸었는데 할머니 차를 보고 다시 놀랐습니다. 대형성조기를 SUV 뒤 양쪽에 달고 외부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트럼프 지지구호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습니다. 제가 “트럼프 지지자이시군요.”하자 “그럼요”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립니다. 단순한 지지자가 아닌 사이비 종교집단(Cult) 신도처럼 보여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품위 있는 외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조국을 떠나 미 대륙으로 이민 온지 33년 만에 처음 실감 있게 경험하는 인종증오 현상입니다. 이것도 코로나 팬데믹의 사회적 후유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염병이 사라지고 사회가 정상화되면 자연스레 아시아인 인종증오 범죄도 사라질 것이라고 억지로라도 믿고 싶습니다.
이러한 살벌한 사회분위기와는 달리 인적이 뜸한 해변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요즘은 비둘기가 짝짓는 계절입니다. 암수 한 쌍이 부리를 비벼대며 애정행각을 벌입니다. 지금까지 관찰한 것에 따르면 오리, 비둘기, 백조는 모두 일부일처제인 것 같습니다. 특히 오리들은 언제나 암수 한 쌍씩 짝지어 다닙니다. 대체로 모든 조류들은 수컷이 화려하고 억세게 보입니다. 산천은 변함없이 울긋불긋 각가지 색깔들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고 비둘기, 갈매기, 오리들은 흰색, 검은색, 갈색이 평화롭게 공존하는데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만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흑인과 아시아인 뿐 아니라 모든 인종이 조화롭게 사는 세상이 아쉽습니다. “All Lives Matter"(모든 생명이 소중하다) 구호가 널리 실천되는 세상이 오기를 조물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벗님 여러분, 다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2021년 5월 5일
뉴욕에서 장기풍 드림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b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