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자콧 게스트 하우스 마당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싸우스 안나푸르나 설산/雪山은 장관이었다. 신비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내가 도착한 9월은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아서 산 전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가끔씩 아침이나 저녁에 날씨가 맑고 강한 바람이 불면 구름이 흘러가는 사이 사이의 짧은 순간에 슬쩍 신비로운 자태를 보여 주었다. 겨울철이 되어 날씨가 맑아지면 히말라야의 9개 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했다. 바로 아래 사진 속의 산이 박영석 산악인이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러 갔다가 사고를 당한 마운틴 싸우스 안나프르나이다
그 곳에는 50대 한국 남자 최 현 씨가 살고 있었다. 현지 네팔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아 키우면서 게스트 하우스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아이엠에프 때 사업과 가정과 건강을 모두 망쳐 버리고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동남아를 떠돌다가 태국에서 만난 독일인이 네팔로 간다고 하자 무작정 따라 나섰다. 네팔에서 등산 용품점에 갔다가 주인 네팔리의 여동생을 소개 받아 결혼했다. 포카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성실한 최 현 씨의 사연을 알게 되자 손님들을 소개해 주었고 게스트 하우스 운영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감사를 표시 하려고 했지만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화를 내기까지 했다. 잘 살면 그게 보답이라고 했다.
시즌에만 손님이 오기 때문에 비 시즌에는 집을 고치거나 주변 산들을 혼자서 누비고 다녔다. 처음에 올 때 보다도 체중이 25kg 가 줄었다고 한다. 온갖 질병이 다 나아서 산을 날아 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모든 게 운명이고 팔자인 것 같다고 말 했다. 손님이 나 혼자 뿐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나를 안내해서 빅키라는 이름의 개와 함께 주변의 산들을 함께 다녔다. 최 현은 산에 갈 때마다 한국에서 가져온 코스모스 씨를 뿌려 주었다. 길 가 곳곳에서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고국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향자콧에서 3주일 동안 머물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을 탔다. 담푸스, 페디 , 바스콧, 에코 빌리지, 강가, 오스트랄리안 캠프 등 주변을 모조리 다 다녔다. 외딴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리기도 했다. 정글 같은 밀림에서 헤메기도 했다. 강을 건너다가 미끄러운 돌을 밟아 물에 빠진 것도 여러 번이었다. 내 평생 가장 많은 거머리를 잡아냈다. 신발. 양말. 바지, 다리 등에 붙은 거머리를 20 여 마리나 뜯어내기도 했다. 한꺼번에 3군데를 물려 피를 흘렸다. 3000계단 돌길을 4번 왕복으로 오르내리며 다리 힘과 자신감을 길렀다.
멀리 떨어진 산 넘어 동네에서 벌어지는 시골 축제 소식을 듣고 찾아가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어린이 집, 유치원, 초등학교가 함께 있는 산 속 학교에 들렀다가 영어 잘 하는 선생님을 만나 네팔 어린이들의 생활에 대해 흥미진진 하면서도 애처로운 이야기들을 듣기도 했다.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개인이 사립으로 운영하는데 학생 수는 모두 합해서 120명 정도이고 수업료는 한 달에 12,000원 정도 하는데 돈이 없어서 학교에 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매년 한국 대학생 봉사단이 찾아와 건물에 페인트 칠도 해주고 벽화도 그려주고 학용품도 나눠주고 아이들에게 노래와 춤도 가르쳐 준다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길도 없는 산 속을 헤매다가 외딴 산 속 농가에 들어가 전통차인 짜이와 감자, 계란, 토마토, 오이로 간식을 얻어 먹으며 그들이 운명에 순종하며 사는 이야기를 듣다가 어두워져서야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조나 수수와 비슷한 밀레라는 곡식이 가슴 높이까지 자라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아 고생을 했다. 밀레는 우리나라 막걸리 같은 술을 만드는데 쓰인다. 집집마다 술을 담가서 가족들이 마시거나 팔기도 한다. 네팔의 9월은 비가 자주 내려 산 길을 따라 물이 흘러 내려서 미끄러웠다.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길도 없는 정글을 탐험 하듯 다녔다. 평화로워 보이는 산 속에서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사는 네팔리들의 모습에 경외감 마저 들었다.
네팔리들은 텃밭이나 작은 자투리 땅에도 밀레를 심는다. 노인들이 있는 집에서는 밀레 열매로 술을 담가 주로 겨울에 많이 마신다. 밀레로 담근 술은 3가지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의 막걸리랑 비슷한 탁한 색이 나는 창을 주로 담근다. 창은 도수가 낮고 상큼해 마시기 좋다. 창을 증류 시켜 소주로 만든 락시는 화덕불로 증류해서 장작 냄새가 난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독특한 향에 맛을 들이면 취하는 줄도 모르고 계속 찾게 된다. 걸쭉하게 막걸리와 소주 중간 쯤 되게 담근 뚬바는 돗수가 가장 높다. 뚜껑을 덮고 빨대를 꽂아 돌려가며 마신다. 밀레는 이렇게 전통주의 원료로 쓰이거나 염소 먹이로 쓰인다.
점점 산 중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나도 히말라야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장딴지만 굵어진게 아니라 간도 부어 오른 것이다. 은퇴하고 오랫동안 ‘아싸’로 살아 왔는데 한번쯤 ‘인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최 현씨와 상의 했더니 자기가 나와 같이 다녀 보니 이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용기를 주었다. 목표는 해발 4.300미터의 MBC (메르디 히말라야 베이스 캠프)로 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입산 퍼밋을 받고 장비를 빌리고 세르파를 구했다.
출발 전에 최종 점검을 해보기로 했다. 향자콧에서 왕복 26km 거리인 해발 2200미터의 오스트랄리안 캠프를 하루에 다녀오기로 했다. 최 현과 마침 향자콧에 머물던 대구에서 온 젊은 트랙커 한 명이 동행을 해 주었다. 난이도가 중급 정도고 든든한 동반자가 있어서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낙오라도 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예정한 시간 내에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이 날 하루에 약 37,000보를 걸었다. 최 현은 나에게 자신 있게 떠나라고 합격 판정을 내려 주었다.
나이 66살이 되어 히말라야에 도전한다는 사실이 나의 심장을 팔딱팔딱 뛰게 만들었다. 그래 한 번 해 보자. 인생은 죽을 때까지 도전하는거다. 영화처럼 나도 헐크가 되기로 했다. 고맙다 향자콧!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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