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5년 국사편찬위는 윤치호를 유력한 애국가 작사가일 것이라고 11대 2로 표결했지만,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작사가로 채택하지 않았다. 다만 애국가 작사가를 조사하면서 ‘1907년 윤치호 작’이란 친필본이 위조(僞造)가 아니라면 애국가 작사가를 윤치호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기재했다. 따라서 에모리 소장 애국가 친필본의 조사는 ‘작자미상’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애국가 작사가 문제 규명을 위해 우선적으로 조사되어야할 문서라고 생각한다. 이에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지난달 31일 다음의 3가지 관점에서 이 문서의 조사열람을 진행했다.
윤치호 친필본의 조사 가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에모리 소장 친필본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애국가 작사가가 윤치호임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서 제출된 적이 있다. 이것이 윤치호의 친필이 맞다면 애국가 작사가중 가장 유력한 작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신이 스스로 작가임을 밝혔다는 문서이므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1990년대 유족들에 의해 에모리 대학에 기증된 이 문서가 1955년도에 언급되었던 문서와 동일한 문서가 맞는지 또한 윤치호의 친필이 맞는지에 대해 서지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에모리 대학에 기증된 뒤, 이 문서를 열람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고, 윤치호의 친필본이 맞는지의 여부 조차 조사된 바가 없었다. 따라서 에모리 대학이 1월 31일 오후 2시 원본의 열람을 허가함에 따라 문서의 기증경위, 보관상태, 친필본의 여부를 직접 조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윤치호 친필본이 위작이란 주장에 대해
1945년 쓰여진 위작이란 논란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는 이 친필본이 1945년에 쓰여졌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문서가 갖는 사료적 1차적 가치는 이 문서의 가치는 쓰인 시점이 1907년이냐 1945년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애국가 작사가라고 밝힌 문건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55년 애국가 작사가 심의당시 거론되었던 인물중 윤치호를 제외하고 최병헌, 안창호, 김인식 등은 애국가의 작사가가 자신임을 직접 밝힌 문서가 현재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1945년 친필본의 한글 표기에 대해 ‘아래 아(·)’ 표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면을 들어 위작이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은 1908년 출판된 ‘찬미가 재판본’ 14장에 수록된 가사를 저본으로 그대로 옮긴 문서이다. 애국가가 1908년 찬미가 14장에 수록될 당시에도 한글의 고어 표기는 이미 사라진 상태이므로 이는 정확한 비판이 아니며 사실관계의 오류(誤謬)라고 생각한다. 윤치호가 자신이 작사가임을 친필로 밝힌 문서는 언제 쓰여졌나의 문제로 중요성이 훼손(毁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윤치호 친필본의 위작 논란은 이것이 언제 쓰여진 문서이냐가 아니라 실제로 윤치호의 친필이냐의 문제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14장 (좌)과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
윤치호 친필본의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윤치호 친필본이 1945년 쓰여졌다면 ‘기록물로서 보존의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만약 윤치호가 작사가가 아닌 상태에서 단순히 애국가 가사만을 적은 것이라면 이 주장은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중의 하나라면 이 문서는 좀더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안익태 친필 애국가 악보가 갖는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안익태는 1930년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가 대한민국 건국이후 국가로 연주되기 시작하자 1949년 친필 악보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1949년도에 쓰여졌지만 작곡가가 남긴 자필 악보이므로 국가 상징 기록물로 대우받고 있으며, 2011년 등록 문화재 476호 ‘안익태 대한국 애국가 자필악보’로 등록되었으며,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1945년 쓰여진 윤치호의 애국가 친필본 역시 윤치호가 작사가가 맞다면 매우 중요한 국가 기록물이며, 문화재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가 맞다 하더라도 1945년 쓰여진 애국가 친필본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친필본이 갖는 '사료적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애국가 작사가로 논의되는 다른 사람들이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남긴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 문서는 더욱 기록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 1949년 11월 안익태가 직접 쓴 등록 문화재 476호 ‘안익태 대한국 애국가 자필악보’. 독립기념관에 소장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여러번에 걸쳐 "애국가는 단독의 작사보다는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민족지사들이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해왔다. 윤치호가 다수의 애국가 작사가중의 하나라면 친필 원본은 당연히 한국에 소장되어야 할 중요 국가기록물이다. 윤치호가 친일파란 이유로 애국가 작사가란 사실이 부정되어선 안되며, 친일파 작사 애국가 이기 때문에 작가미상 상태로 남겨 두려고 해서도 안된다.
윤치호의 애국가 친필본을 열람하는 것은 서지사항과 보관상태 등을 확인하는 것이지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가설을 한번도 부정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안창호의 안창호애국가 작사설을 여러번에 걸쳐 언급해 왔다.
국사편찬위가 1955년 11대 2로 가장 우세한 애국가 작사가로 선정한 사람의 친필본이 존재한다면 누구라도 진본여부와 서지사항. 기증경로를 조사하고 직접 열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논란의 논란을 거듭하는 에모리 대학 방문열람이 2015년 8월 15일 해방 70년을 맞는 시점까지 작사미상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애국가 문제해결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상과 같이 윤치호 친필본 열람에 관한 입장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