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벗님들께 보내는 스물여덟번째 편지
by 장기풍 | 20.09.23 20:37

진한 외로움과 함께 깊어가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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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진다는 추분(秋分)입니다. 영어로는 ‘Autumnal Equinox Day’ 즉 가을철 주야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구 남반구는 춘분입니다. 북반구의 66.5도 북쪽은 오늘부터 내년 춘분까지 낮에도 어두운 흑야기간에 들어가고 반대로 남반구 66.5도 남쪽은 밤에도 환한 백야기간에 들어갑니다.

 

추분은 겨울의 입구이기도 합니다. 새벽 4시면 동쪽하늘에 먼동이 트이던 때가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지금은 6시도 컴컴합니다. 기온도 뚝 떨어져 새벽에는 한기(寒氣)마저 느낍니다. 반바지 산책도 끝나고 해변의 비키니도 사라졌습니다. 대신 산책과 낚시꾼이 부쩍 늘었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세월의 흐름이 빨라집니다. 10대어린 시절에는 시속 10마일, 3030마일, 5050마일, 70대는 70마일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저도 벌써 이민생활 33년에 롱아일랜드에 이사 온 지도 20년에 접어듭니다.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도 있지만 아직 제 자신은 설익은 떫은 감처럼 생각됩니다.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면 세속적으로는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빚진 것 없이 자녀들도 각기 제 몫을 해내고 손자손녀들도 건강하고 우리 때보다는 지혜롭게 성장하는 것 같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코로나 감염자가 700만 명이 넘고 사망자도 20만 명을 훌쩍 넘겼습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감염자 3200만명, 사망자도 백만에 달합니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경고하는 겨울철 대유행입니다. 미국은 벌써 징후가 보입니다. CNN 방송은 미국 50개 주 절반이 넘는 28개 주에서 코로나 환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 중 캔사스를 비롯한 5개 주는 검사자 양성판정 비율이 무려 15%가 넘습니다. WHO는 비즈니스 reopen 기준을 최소 2주 이상 양성판정 비율 5% 미만을 유지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미국 27개주 양성판정 비율은 이를 훨씬 넘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욕주 등 동북부 몇개 주 양성비율은 1% 미만입니다. 제가 사는 롱아일랜드는 겉으로는 코로나 이전과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이 코로나에 면역되고 팬데믹 시대를 요령 있게 사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입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여성과 인권운동의 거목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87세 나이로 18일 별세해 미 전역에서 추도의 물결이 넘치고 있습니다. 미국 남녀노소들은 마치 록 스타를 추모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좋든 싫든 인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구 40%인 뉴욕주는 지금도 매일 8백명 정도 확진자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초기 한산했던 고속도로는 이전처럼 교통체증도 심하고 쇼핑도 거의 정상입니다. 그러나 마스크 착용은 철저히 지키는 편입니다. 코로나가 일상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백신이 보급될 때까지는 어차피 코로나와 함께 사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동네공원을 산책했습니다. 벌써 단풍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8월초 뉴욕을 할퀴고 간 아이시아스 이후 여러 차례 허리케인이 미 동부를 지나쳤지만 요행히 뉴욕은 멀리 비켜 갔습니다. 오늘도 허리케인 테드가 뉴욕 동쪽 먼 바다를 지나 캐나다 노바스코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국립 허리케인센터는 올해 104년 만에 처음 열대성 태풍과 허리케인 습격을 가장 많이 받은 해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올해 대서양 기후변화 영향으로 23개 태풍과 허리케인이 발생해 그 중 8개가 남부해안을 휩쓸었습니다. 어제 밤에는 9번째 허리케인 베타가 걸프만지역 텍사스주 매터고다에 상륙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허리케인이 본토에 상륙하는 일은 1916년 후 처음이라고 합니다. 동네공원에는 지난 허리케인 아이시아스의 상흔(傷痕)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축구장 2~3배 크기 주차장 하나가 완전히 폐쇄되었습니다. 그곳에 부러진 나무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한쪽에서는 분쇄기에 넣어 가루로 만들고 있습니다. 허리케인에 희생된 나무시체장례절차처럼 생각됩니다.

 

산책길에 낯익은 동네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걷습니다. 인도계통 노인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턱수염을 교묘하게 두 갈래로 나눠 얼굴에 감싸 천연마스크로 사용합니다. 저를 만나 반갑다며 길게 안부를 나눕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하루도 빠짐없이 한 시간 이상 빠른 속도로 걷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지역 카슈미르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왜 안 보였느냐며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냅니다. 매일 바닷가와 숲속을 번갈아 다녔다니까 'good idea'라며 부러워합니다. 그분도 진한 외로움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코로나시대의 일반적인 표정입니다. 외로움도 전염되는 모양입니다. 저도 갑자기 조국의 그리운 벗님들이 한 명씩 떠오르며 간절히 보고 싶어집니다. 예년처럼 비행기표 끊는다고 훌쩍 달려갈 수도 없습니다. 한국 도착해 14, 이곳에 와서도 14일 자가 격리해야 합니다. 우울한 마음에 더욱 그리워지는 벗님들입니다.

 

지난 3월초 사랑하는 벗님들에게 한국에 못가는 대신 이곳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시작했던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열 번이면 끝나겠지 했던 것이 반년이 훌쩍 지나 28번째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소식을 전해드려야 끝날지 기약도 없습니다. 벌써 봄, 여름이 지나고 겨울의 문턱인 가을이 깊어갑니다. 정말 새가 되어서라도 날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조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민족대이동인 추석을 앞두고 여러 집회계획까지 예고되어 있어 추석연휴가 코로나 재확산 계기가 될 것 같아 걱정이라는 소식입니다. 제발 무사하기만을 기도드립니다. 대한민국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기대하며 믿습니다. 벗님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또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2020922

 

뉴욕에서 장기풍 드림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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