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정념과 인식
경이가 우리에게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경이의 유용성은 그것이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배우게 하고 기억을 환기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경이가 갖는 참된 의의는 그것이 회향의 시발이 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런 정념을 천성으로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회향과 단절된 자다. 그런 자는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경이에 사로잡히기 쉬운 자는 가장 현명한 자도 가장 어리석은 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회향 과정에서 회향의 소멸을 보며, 후자는 회향의 출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장하는 데 따라 경이의 본래적 경향을 될 수 있으면 탈피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경이란 바로 불일치에 의해 유발된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불일치를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이를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식을 증대해 가고, 또 희소하고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면밀히 준비하여 관찰하는 습관 을 길러야 한다.
과도한 경이를 경악이라 할 때 경악의 상태란 과도한 불일치에 압도되어 정신적 활동뿐만 아니라 전신이 정지 상태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는 불일치의 주체인 자아의 감각도 마비된 상태로 오직 대상과의 넘치는 불일치만을 순수한 상태로 접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서 이러한 불일치의 주체, 즉 자아를 감지하고, 자아와 불일치 관계에 있는 비아를 감지할 때, 정념은 공포로 전환한다. 최대의 공포는 주로 최대의 불일치로 인한 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는 아직 무(無)의 개념이 확립되기 이전 단계다. 상반신은 사람이고 다리와 꼬리는 염소이며 이마에 뿔이 있는 그리스 신화의 목신(Pan)의 모습은 공포의 상징이며, 공황 즉 패닉(panic)의 어원이기도 하다. 인간 인식이 양적 수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인간 각자에 따라 주관적으로 차이를 가진다. 따라서 각자에 따라 공포의 내용도 상이하며 고대인에게 현대인보다 더욱 공포의 정념이 강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공포는 신비주의의 모태이기도 하다.
무를 자아의 것으로 확인할 때 비애의최고형태인 절망감에 빠지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이 절망감에서 최대의 비애를 느낀다. 이 절망감 속에 있는 자아를 재음미할 때 인간은 비참함을 느낀다. 절망감은 비애의 최고 단계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불일치의 해소가 자살로 귀결될 수도 있다. 절망감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적이다. 그러나 무 또는 철저한 불일치의 인지에서 나오는 절망감은 바로 자아를 회향과 불가분한 존재로 인지하기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불안 역시 알 수 없음과 관계된다. 발생학적으로 이것은 공포의 완화로서 나타난다. 즉 공포가 주는 불일치보다 완화된 불일치를 감지하는 것이다. 경이나 공포가 단지 불일치를 감지하는 것에서 유발되는 데에 반해, 불안은 이보다 발전적인 양태로서 비 완화로서가 아니라 단독으로 일어나는 불안이더라도 동일하다. 불안의 정념에서 비로소 일치의 씨앗을 보기 시작하는 단계다. 이러한 사정은 공포의 정념에서 일치의 첫 경험이 형성된다. 그러나 불안이란 이 첫 경험을 실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첫 경험에는 제 2 단계에 근접한 인식의 요소가 도입되므로 이러한 첫 경험에서 비로소 일치와 불일치에 대한 재음미가 시작된다.
여기서 불일치 속에 있음을 아는 것으로의 이행이 가능해진다. 내심의 불안은 결여의 의심에서 비롯된다. 즉 불안은 불일치를 완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자기회의이다. 이 회의는 불일치 속에 여전히 잔류하는 것이기에 일종의 비애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회의는 미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또는 과거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발전적 존재로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결코 이 회의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제 2단계에 속하는 정념은 제 1단계에 비하여 보다 순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정념은 우리 정신의 최고형태인 의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부단히 재촉하게 된다. 여기서는 정신적 경로의 다른 방향 즉 자투의 경로에 속하는 인식에 가까운 것이 발생한다. 이러한 사정은 인간의 모든 심적 능력이 동일한 불일치 해소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어떤 불일치 또는 일치를 안다는 것은 아직 개념적 인식은 아니고 감각적 감지와 결부된다.
이러한 감지의 경험을 재음미할 때 우리는 자아가 불일치의 심연 속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불일치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인간존재야말로 불일치를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불일치를 감지하고 그것을 보다 명확한 상태로 인식할 때 인간이 빠지는 가장 강렬한 정념은 비애다.
인간은 영원히 이 비애의 정념에서 해방될 수 없는 존재다. 자아, 그리고 실재하는 모든 현존재에게 가장 본질적인 것은 바로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애의 원형은 현존재로서의 자아가 불일치 속에서 자기 존재 자체를 상실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데에서 유래하는 근심이다. 이때 비애는 자기반추에 의해 획득되는 정념이다. 비애는 이미 인간이 하나의 전체를 상상하고 있고 자신을 그 전체의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자아를 완전성에서 유리된 존재로, 전체와 비교해 결손된 존재로 인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신성한 정념이다. 우리의 제 정념이 잠들어 있을 때에도 인간을 사로잡는 존재 자체에 대한 근심인 비애는, 인간 이 회향적 존재임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비애의 본질적 의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정념론에서 비애와 관련한 오류는 비애를 나쁜 무활동 상태로 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견은 비애를 과정적 연쇄 속에서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협소하게 보는 관점에 기인한다. 비애에 사로잡혀 무활동 상태에 빠져있는 것은 회향을 포기하고 있는 자에게만 국한된다. 그리고 이것은 절망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감도 최후의 투쟁을 야기한다 는 점에서는 무활동 상태가 아니다.
이때 인간이 감행하는 불일치 해소 투쟁은 자살이다. 그러나 자기반추로서의 비애란 자기 음미를 통해 불일치를 인지하는 것으로, 다음 순간 불일치에 대한 강렬한 불일치의 유인이 된다. 비애는 투쟁의 강력한 유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에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비애의 감정을 해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존경할 만한 인간은 이러한 비애를 딛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여 회향을 이루는 자다.
비애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비애에 대하여 애정을 가질 것,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애가 회향적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념을 형성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 불일치의 현실을 끊임없이 파괴할 것을 고무하며, 현실을 타파하는 행위에 동의하고 협력하여 완전성으로 나아가도록 인간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애의 본질을 음미할 때, 거기서 우리는 인간이야말로 불가피하게 회향적 존재로 교묘히 형성되어 있는 반자연적 질서의 경이임을 확인한다. 현존재를 비애 속에서 발견하는 자에게 실로 회향은 더욱 간절하다.
불일치를 안다는 것은 동시에 일치를 알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환희는 비애와 반대로 일치의 인지에 기인하는 정념이다. 환희와 기쁨 속에서 현존재적 세계를 보는 것은 마치 눈 덮인 세상을 보는 자와 같다. 환희에 사로잡힌 자는 머지않아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더욱 증가된 질곡의 세상을 발견할 뿐이다.
왜냐하면 현존재는 견딜 수 없는 불일치의 누적 속에 매몰되어 있고 자아 는 회향 과정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향유하는 환희란 찰나에 불과한 것이고 전체가 드러나 버리자마자 스러져 버린다. 이에 비해서 비애는 허위와 기만성이 더 적은 고유한 자아의 정념이다. 비애는 환희에 비해 훨씬 더 정직한 것이고 기만과 허위성이 적은 것이기에 비애는 환희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에 결여되어 있고 파괴적인 어떤 사항을 제거하는 것, 즉 신기루에 불과하고 또한 없어도 좋을 완전성의 환각을 획득하는 것보다 비애와 슬픔의 기초 위에서 불완전성을 직시하는 것이 회향적 존재에 더욱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비애는 조심성과 근심을 주어 인간을 보다 사려 깊게 만드는 데 비해 환희는 인간을 들뜨고 방향을 못 잡는 어처구니없는 존재로 만든다. 현존재로서 자아는 항상 비애감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해방을 향한 전진과 장애의 지양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각성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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