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향의 인간학적 원리(2)
by 현승효 | 23.02.26 17:19

1부 회향의 원리

1장 회향적 존재

 

 

위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모든 사상체계는 현재 상황을 파괴되어야 할 질곡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또 거기에는 운동성 내지 투쟁성이 불변의 요소로 내재되어 있다. 현재 상황을 파괴되어야 할 것으로 다루는 운동에서 모든 다양성을 추상하고 운동만을 파악할 때, 이 운동의 본질은 불일치에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경신이고 자기전개다. 운동이 실제로 역동적이려면, 그것은 불일치의 고착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경신과 부정이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에서 운동의 최고 형태를 본다. 이 최고 형태를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 투쟁은 불일치 자체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투쟁은 불일치에서 유발되며 일치를 지향한다. 이는 인간의 자기입법적 본성에 의거한다. 투쟁은 불일치의 무의식적 지속이 아니라 불일치의 의식적 자기경신자기부정이라는 점에서 운동의 최고 형태다.

 

뿐만 아니라 운동의 본질이 불일치라면 불일치의 성립조건으로서 일치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운동적 일치상태에서 어떤 동인에 의하여 그것은 불일치로 전환되며 이 불일치 자체는 계속적 자기경신을 통해 다시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치불일치일치라는 도식은 운동의 회귀적 본질을 요약해준다. 다시 말하면 운동은 자체의 소멸로 나아간다. 따라서 불일치인 운동은 일치로 가는 경로다. 현재 상황에서 투쟁적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일치로의 회귀다. 이 회귀를 나는 회향이라고 부른다.

 

모든 상황 속에서 자아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비아와 대립관계에 들어선다. 이로써 불일치 상태에 처한 인간은 실향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은 모두 회향이다. 이 점에서 불교나 기독교 혹은 맑스주의의 문제 해결 과정은 인간학적으로 볼 때 이 회향의 상이한 경로인 것이다.

 

이 모두는 현재의 불일치대립갈등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다. 인류가 현재 상황 하에서 질곡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하등의 운동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아와 비아의 대립을 아는 존재다. 인류는 현재 상황을 진보적 운동으로써 파괴해야 할 것으로, 또 자신을 해방되어야 할 존재로 간주해 왔다. 역사는 이처럼 당면 상황을 질곡으로 간주한 자들의 것이었다.

 

 

자유와 투쟁

 

우리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실마리는 자유와 투쟁이라는 두 개념이다.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목적을 설정하는 개념이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이다. 그 결과로 획득되는 자유는 칸트가 말하는 원인으로서의 자유이기도 하다. 이때 원인과 결과로서의 자유는 동일한 것이다. 이 원인적 자유와 결과적 자유는 자연적이지 않고 이성적이다. 인간 자신의 손에 이 자유라는 무기가 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 역시 인간의 자유에 속한다.

 

자유는 모든 외적 규정으로부터 무제약적이어야 한다. 즉 자유는 분석적으로 일체의 외적 사실에서 독립된다는 규정을 가진다. 자유는 오직 자유에 따라야 한다. 여기서 자유의 복종적 성질이 나타난다. 자유는 내적 복종성과 외적 해방성을 가진다. 양자 모두 자유의 속성이며, 이 양자 중 하나가 우세할 때 갈등이 일어난다. 즉 투쟁이 유발된다.

 

투쟁의 동인은 자기만족이다. 자기만족이 투쟁의 척도가 된다. 이 자기만족이 만인의 것과 같은 부류의 것이면 도덕법과 일치한다. 이 자기만족에는 두 종류가 있다. 예지적 정신적 자기만족과 쾌를 수반한 감정적 자기만족이 그것이다.

 

자유는 무엇에서의 해방이란 명제에는 운동의 방향이 전제된다. 자유는 어떤 운동을 내포하며, 이 운동은 어떤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투쟁을 의미한다. 자유가 인간의 한 본질이라면 그 투쟁의 동인도 인간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떤 독자적 존재 내지 순수 통일체로 전진하는 운동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양면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양면성, 즉 일면 신적인 예지계에 속하고 일면 감성계에 속하여 늘 갈등하는 인간의 양면성, 바로 이 양면성 때문에 인간은 아직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그 갈등을 넘어서 완전성에 이를 때까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운동, 즉 투쟁이 지속된다. 이 투쟁은 완전성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자유의 이념인 완전성은 일체의 갈등과 모순과 투쟁이 해소된 상태, 즉 자족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가 실현된 완전성 속의 인간이란 이미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양가적이며 그 갈등이 해소되려면 인간 속성 중의 어느 한쪽, 순수 예지계에 속하든지 아니면 순전히 감성계에 속하든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게 될 수도 없고(전자), 또는 그렇게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후자). 그러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향은 이 양자의 균형, 일체의 투쟁이 종식된 상태,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은 균형 상태를 이루는 것이고, 이때 인간은 자기존재에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순간적이기는 해도 어떤 만족을 얻기도 한다. 현실적인 만족은 예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양자의 균형상태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 인간에게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 균형은 항상 도전받는 것이고 인간의 만족이란 순간에 불과하다. 왜 그것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며 영원한 자족상태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일까? 이는 예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균형을 자족의 한 방편으로 삼을 때, 불완전한 인간을 척도로 하며 이때의 자유가 인간을 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한 자유가 될 때 자유는 이미 인간을 위한다는 조건에 구속되며, 이로써 자유 본연의 존엄성과 멀어진다. 그러한 자유는 이미 본질적 자유가 아니라 사이비 자유다. 그래서 그에 따른 만족상태는 일시적일 뿐이다.

 


글 현승효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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