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테헤란 탈출기(下)..헛된 권력의 종말
by 신상철 | 11.02.05 01:57

대한민국에서 60년대와 70년대 혹독한 군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지구상 어디가서라도 살 수 있다는 말을 한다. 군 경험으로 다져진 자신감에 민간인 외국인 기술자라는 신분이 현지 생활에 별 어려움 없이 적응하도록 도왔다.

 

▲ 이하 사진 www.wikipedia.com

지루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이란이란 나라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생각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친구도 사귀며 이란 사회의 실상이나 정치 경제 등을 살펴 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란 사람들이 갖고 있던 팔레비 왕에 대한 불만과 정책들에 대한 반감(反感)들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주마등처럼 옛 기억이 스쳐갔다. 인산인해를 이룬 카운터 틈바구니에서 딸아이를 어깨위에 앉혀놓고 옴짝달싹 하지도 못한 채 지난 2년 동안 이 땅에서 우리 가족이 살아온 모든 것들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정오가 되어 가고 드디어 항공사 직원이 카운터에 나타나 체크인을 시작한다. 맨 앞줄에 있는 우리보고 티켓을 달라해서 건네주니 거의 집어던지듯 돌려주며 “이 Ticket은 15일후의 것”이라고 쏘아 부친다.

다시 받아 넣고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직원은 “오늘 예약된 Ticket 소지자는 Counter 로 오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아우성이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결국 항공사는 날짜에 상관없이 티켓을 가진 사람들을 앞사람부터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황급히 애들 손을 잡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출국장으로 나가지 못해 카운터를 넘어 사무실을 통과해 간신히 램프로 나갈 수 있었다.

항공기에 탑승(搭乘)하고 문이 완전히 닫혔다. 지상 활주(滑走)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기분이 뒤숭숭했다. 마침내 비행기는 힘차게 이륙해서 고도를 높이며 상승했다. 그 순간 뒤쪽에서 큰 소리와 함께 박수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외국인도 아닌, 이란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무사히 탈출한 것을 서로 축하하며 떠드는 것이었다. 뭔가 가슴속이 뭉클하면서 찌릿한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내 조국으로 돌아가는 동쪽행 비행기가 아닌, 어딘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서쪽행 비행기를 탔기때문이었다. 회교혁명이 일어난 이란을 탈출했지만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여관에 들어가나 세계 어느 나라 공항에 도착해 여관으로 가나 여관에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왕 내친 걸음 조국에는 아무런 빚도 없으니 그 한심한 땅엔 돌아가지 않고 밖에서 살리라 하는 비감한 심정이었다.

어느덧 곤히 잠들은 막내딸을 바짝 당겨 안으며 아이의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세월이 흘러 어언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한 세월이 흐른 지금. 이집트 사태를 보면 당시 테헤란에서 탈출하던 기억이 떠오르며 상념(想念)에 잠기게 된다. 나는 권력이라곤 초등학교 때 분단장 한번 해본 적밖에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왜 위정자(爲政者)들은 권력에 그토록 목숨을 걸고, 결국은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지….

무바라크.. 그 사람, 33년 전 팔레비가 모든 것을 잃고 자기 나라로 쫒겨 왔던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目睹)하고도 말년을 불명예스럽게 결말짓는 것을 보며, 헛된 권력의 종말을 모르는 우둔함에 혀를 차게 된다.

 

타고난 역마살(驛馬煞)로 동남아(인도네시아, 태국)와 중동(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남미(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페루) 등지를 여행하면서 본 것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결국은 파괴된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30년 장기집권의 무바라크도 예외가 아니란 사실이 또한번 증명된 셈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는 내일이 있을 수 없다’는 명제 때문이 아닌가.

무바라크여! 이제는 저 거대한 피라밋 안에서 편히 쉬심이 어떠한가.

by 임근하 2011.11.13 17:27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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