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지명은 이씨조선 작품
*댓글에 대해 논평한다*
댓글: 현 遼寧省의 遼河가 938년에 처음으로 이름지어졌다는 걸 遼史 말고 다른 기록이 또 있나요? 遼나라는 宋과 수시로 치고박는 싸움을 했다면 당연히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렇다면 고려와 遼와 宋의 경계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요? 金나라는 遼의 북쪽에 위치해야겠지요?
논평:
역사는 문헌(文獻)에 의한 사실을 고증하는 학문이다. 문헌이란 문물제도(文物制度)의 전거(典據)가 되는 기록이나 문서로써 문헌은 1차사료와 2차사료로 나눌 수 있으며 1차사료란 어떤 사건이 발생한 그 시기에 기록되었거나 그런 사건의 최초의 기록을 말한다. 그러므로 전거를 제시할 때는 반드시 1차사료에 근거해야 하고 2차사료는 1차사료를 보충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박·석사 학위및 학술논문이나 단행본은 문헌도 아니며 1차사료도 아닌 것이다.
첫째, 요나라, 요하에 대한 기록은 <遼史(요사)>가 1차사료이며
둘째, 회동원년인 938년에 요녕성의 요하(遼河)란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1차사료인 <요사>밖에 없고
셋째, 요(거란족)나라를 세운 야율아보기의 고향은 청해성 남부 칭다현(稱多縣) 남부 일대로 감숙성 산단현(山丹縣) 남쪽에 있던 대진의 부여성(부여부)을 공격하면서 북동방진출을 하게 되며 → 김태영,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제17집) 서울: 세계출판사, 2022, pp.143-146.
넷째, 요나라는 요양(遼陽)으로 알려진 지금의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의 동평군(東平郡)에서 생긴 나라로 오늘날의 요녕성 요양이 아니며 →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2022), p.143.
다섯째, 요(거란), 금(여진), 원(몽고), 명나라까지도 대진과 고려를 침략할 때는 항상 북서쪽 혹은 서쪽에서 공격을 했고
여섯째, 산서성은 고구려, 대진, 고려의 핵심 영토로 서쪽은 황하 북쪽은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의 만리장성이 버티고 있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직접 침략할 수 있는 길이 없었으며
일곱째, 북에서 침략하려면 반드시 황하를 건너야 하는데 황하강이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물이 얕은 지역이 바로 내몽고를 지나는 황하로 항상 이곳을 건너 침략하였고
여덟째, 그런 이유로 요와 대진 그리고 요, 금, 원, 명과 고려의 전쟁에는 항시 대진과 고려의 서쪽에 위치한 산서성 압록수(鴨綠水)가 등장하며
아홉째, 금나라 도읍지는 길림성 회령으로 지금의 백성(白城), 요나라 도읍지는 내몽고 임황으로 지금의 임서(林西), 원(몽고)의 도읍지는 내몽고 지금의 상도(商都)로 모두 북쪽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곧 출간될 필자의 학술논문 『고려의 강역 연구』(제19집)을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Corean History - 한국사
DRPAULKIM.BLOGSPOT.COM
Corean History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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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00
유익한 포스팅 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질문 같기도 하지만 박사님의 주장이 평소저의 협소한 상상을 벗어난 것이라 이런 의문도 가져봅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 한국에 중국의 지역을 본 딴 지명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미국에도 유럽의 지명이 많이 있지요. 유럽 사람들이 신대륙에 와서 정착하면서 자신들이 살던 유럽 지역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때문입니다. 이런 의문쯤이아 당연히 극복하셨을 줄 믿습니다만 알기쉽게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00
북미에 유럽 지명이 있는 까닭은 당시에 북미에 거주하는 자신들의 고향이 유럽이기 때문이듯이 반도에 대륙의 지명이 있는 이유도 같은 까닭일 것 입니다. 지명은 자연물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므로 지명의 音과 意는 주로 뜻글자로 표현합니다. 漢陽이 漢水의 北邊을 가르키듯이 한양이라는 지명은 한수라는 하천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반도에는 한수는 없고 漢江이란 지명만 있습니다. 옛사람들이 바보라서 江과 水를 구분 못했을거라 보는 사람들이 한국역사학계 입니다. 先人들이 동서남북 방향도 구분못한다고 여기는 분들이 한국역사학계입니다. 그래서 東京을 지금의 경상도 경주로 해석하지요.
Paul Kim
장00 공개 댓글 참고하세요.
*한반도의 한자 지명은 언제부터인가*
수치스러운 이씨조선(李氏朝鮮)을 제외한 모든 왕조들 즉, 왕건이 세운 고려(高麗)까지 대륙에서 건국하여 대륙에서 패망하였다. 한반도에 한자지명이 생긴 것은 이성계가 사방 6,000리의 광활한 고려 땅을 홍건적의 수괴 주원장에게 빼앗기고 고려의 변방인 한반도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의 아들
1. 이방원에 의해 1413년 <조선팔도 시행>이 최초이며
2. 그 후 노사신, 양성자, 강희맹 등이 <동국여지승람>(1425)을 지어 한자 지명이 서서히 이루어졌고
3. 지금의 <세종실록지리지>(1432∼1452)는 세종 14년부터 단종 2년 사이 21년 동안에 만들어진 것이다. 세종은 고려의 정사(正史)인 <고려실록>를 그의 신하 정인지와 함께 없애고 개찬이란 이름으로 정인지가 지금의 <고려사>를 지었다. 대륙 고려의 모든 한자지리지명들을 한반도에 이식(移植)시킨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이도(세종)이다.
4. 명나라에 고려 영토를 빼앗긴 것은 이성계부터 시작하여 이방원을 거쳐 이도(세종) 때 절정을 이루다가 이향(문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5. 한치윤, 한진서의 <해동역사>(1823)가 나타나고
6. 고산자 김정호라는 가공인물이 <동여도>(1857)를 만들었다고 교묘하게 각색하여 자신들의 지리지명 역사왜곡을 합리화했고
7. 그 같은 증거로 김수로왕 묘지앞 가락국 태조릉 숭선전 비석은 고종 21년 갑신년(1884)에 세운 것이다. 김수로왕의 무덤은 가짜이다. 한반도에 있다고 믿고 있는 왕들의 묘는 100% 가짜이다.
한마디로 말해 한반도의 지리지명은 대륙의 지명들을 한반도 지도와 비슷하게 각색하여 이씨조선이 만든 것이다. 대륙에는 한반도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똑같은 지명들이 꽉 차있다. 저자의 학술논문 <고려의 강역 연구>(6월말 출간 예정)를 참고하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라 경덕왕(739∼761) 때에 한반도에 한자지명들이 대대적으로 이루졌다고 주장하였으나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없는 논리의 비약으로 허구(虛構)의 소설(小說)이다.
장00
감사합니다~
이00
정인지 등의 고려사나 勝覽 世志 등에 경덕왕 때 어쩌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 같아요.
Paul Kim
이00 왜곡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는 문헌사료들을 교차확인해야 하고 사료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거로 제시된 <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장편)>은 필원(畢沅) 등이 청나라 건륭 25년(1760)에 완성한 문헌으로 고려가 망한지(1392) 369년 즉, 강산이 37번 변한 후에 나온 책이며 고려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왜곡(歪曲)된 책으로 사료비판을 했어야했다. 이 대목에 관한 한 정인지의 개찬 <고려사>가 더 정확하다. 다시말하지만 문헌사료로부터 전거를 제시할 때는 반드시 1차사료를 제시해야하고 왜곡의 극치를 이룬 명대와 청대의 문헌들은 반드시 사료비판이 함께 따라야 한다.
이00
Paul Kim 그렇군요. 청나라 때 나온 거면 사료비판이 필요하겠네요.
송과 거란의 싸움에서 고려의 역할은 뭘까요?
고려의 강역 안에 송나라가 찡겨 있었단 생각이 듭니다.
거란과 고려는 고구려 후계자를 놓고 다투었을까요?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