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또 자고..... 몇날 며칠을 그렇게 잤다. 마치 잠하고 웬수라도 진 사이 인양 누가 이기나 내기라도 하듯이 내리 잤다. 인천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던 크리스마스 날. 몸은 말할수 없이 녹초가 되어 탑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한숨도 눈을 부칠 수 없었다. 잠이 오기는 커녕 오히려 14시간여 비행 내내 여러 상념으로 골똘해지기만 했을뿐.
지난 11월 중순 생일을 앞두고 옆지기는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지 기회될 때 마다 은근슬쩍 아이디어 염탐(廉探)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늘 추수감사절 기간과 맞물려 있어 시댁에서 갖는 가족모임으로 희석되곤 했던지라 생일이란것에 비중을 두지도 그닥 연연해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뭔가를 해주고 싶어하기에 가능하다면 '휴가'로 달라고 했다. 날짜 제한없는 휴가를 받고 서울로 날아가면서 마음이 한껏 가벼워야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가는 노모를 생각하니 이렇게 모녀가 단둘이만 지내보는 생일도 올 해로 끝이겠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딸의 깜짝쇼에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항공요금 비싼데 뭐하러 자꾸 오냐고, 사위한테 면목이 안선다며 연신 미안해하는 엄마와 며칠간 오붓하게 활주로가 보이는 호텔에서 보냈다. “이런 행복한 날이 며칠이나 더 있을랑가 모르겠다'”라시며 시간가는것을 아까워 하시는 모습에서 역시나 생일선물(!)을 제대로 챙겨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코 끝이 찡해왔다.
며칠간 풀어제낀 모녀의 수다가 끝나고 엄마는 다시 데이케어 센터를 다니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난 곧장 자원봉사를 신청하였다. 상담이 끝날 무렵 내 경력을 본 분이 ‘어르신들께 멘토’ 즉, 말동무 역할을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지속적일 수 없는 내 상황이나 입장 등을 고려해 볼 때 “어르신들이 자꾸 찾게 되면 그 또한 곤혹스러울 수 있겠다”며 단순한 청소일을 하기로 했다.
자원봉사를 시작한 곳은 다름아닌 '요양원'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에 쾌적한 시설, 짜임새 있고 투명한 운영방침,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산책이 가능한 정원이 있는 인상깊은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잡아 끈 것은 어른들 특성과 체력에 맞게 안배된 다양한 놀이와 프로그램들이 있다는 것과 그곳에 살고 계신 어르신들의 밝고 명랑한 표정들을 보려니 이곳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겠다 싶어 절차를 밟아 엄마를 대기자 명단에 올린 곳이어서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의미도 각별하게 다가왔다.
“인절미가 땅바닥에 떨어져도 주워먹을 수 있을만큼 깨끗하더라”는 엄마가 받은 첫인상도 긍정적으로 거들었다. 다만, 대기자가 많다 보니 입소가 요원(遼遠)해 보인다는 것. 어쩌면 인기있는 다른 곳만큼이나 여기도 2년여 기다려야 한다고 들으니 어떻게 해야하나 싶었지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가을이 깊어가는 무렵 실무를 맡은 분으로부터 20여년 역사를 깨고 강령이 새로이 신설되었는데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어머니에 한해서 빨리 입소를 하실수 있는 기회가 될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전해왔다. 막연하게나마 그렇다면 2년씩 걸리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은 생겼다. 그런데 한국 들어와서 얼마 되지않아, 그것도 자원봉사 시작한지 며칠만에 준비가 된 상태라면 특례입소를 진행할 수 있도록 절차를 밟겠다는 연락이 왔다.
요양등급도 나와 있었고 서류도 갖춰져 있었으며 시설을 이용하는데 결격 사유가 되는 법정 전염병도 없었기에 당장 가능했지만 요양원 입소라는 것 자체가 막연하게만 여겨졌지 막상 당면한 현실로 받아들이려니 당사자인 엄마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심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봄으로 미루면 어떨까?" 여쭈니 "아니다, 네가 있는 동안 들어가는게 좋겠다. 내가 들어간 뒤라야 너도 마음 놓고 뉴욕으로 돌아갈 것 아니냐” 라는 말에 힘입어 진행을 서둘렀다. 마침 계절상으로 12월 초 여서 동장군(冬將軍)이 맹위를 떨치기 전에 입소를 하는것이 적응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변의 조언아래 경황없지만 그에 따르기로 했다.
돌아보건대 '요양원' 이란 단어가 쉽게 단시간내에 받아들여진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신이 살아온 세대나 그간의 경험으로 요양원은 양로원(養老院)이나 같은 의미였으며 집이나 자식이 없는 무의탁 노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여겨져서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가지 건강상의 이유로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옛날 당신이 해온것처럼 며느리 수발을 받기엔 시대가 많이 달라졌음도 이해하고 있었다.새 집으로 이사간 다음 '입주 간병인'을 두는것도 고려해보고 다른 아들이나 딸이 모시는 방법도 논의 되었지만 어느것도 현실적이지 못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 처럼 행여라도 당신으로 인해 자식들간에 분란이 생기거나 우애가 깨질 수 있다는 것, 모시고 사는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사회생활과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절충된 안(案)이 시설(施設)이었다. '집 보다 나은 곳을 내가 찾아낼테니 그때는 미련없이 아들네를 독립시켜 주고 절 믿고 따라와 주십사'고 했을때 '나이가 들면 자식말을 따라야 한다'는 당신의 지론대로 "그래, 네 말대로 그렇게 하마" 라고 하였기에 지금의 싯점이 서로 마음 다치지 않고 자연스레 분가할 수 있는 때라고 여겨졌다.
11월 말 입소를 목전에 둔 어느날 평소 깊숙이 넣어두었던 통장들을 꺼내놓은 당신은 평소 며느리가 몰던 차가 돌아가신 아버지 것이었는데 "사고 없이 7년간 잘 탔으나 이젠 차를 바꿀 때가 되었다"시며 적금을 해약 해오라고 했다. 만원짜리 한장도 기분으로 쓴적 없는 엄마의 돌연한 행동에 놀란 내게 아들네와 합가한지 10년 세월이 흘렀고 시 자(字) 들어가는 것은 시금치도 안먹는다는 며느리들이 많다는 요즘 세상에 나름대로 한다고 애쓴 것을 모른체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비쳐졌다.
“가지고 계셔요. 다음에 하셔도 ......” “그래도 언제고 한번은 해야 할 일 아니냐.”며 지금이 그 때 라고 하셨다. 입소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들을 챙기면서 아들네와 헤어지면서 끝 마무리를 멋지고 화통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이 행여 도를 넘은 것은 아닐까 싶어 그 속내를 읽어내려니 오히려 내가 속으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 지금 우리는 엄마를 편하게 모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제발, 그냥 넣어두세요. 이런걸 보고 요즘 애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쿨(Cool) 병이라고 그래. 쿨병도 지나치면 병이래요. 병!”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울컥 올라왔다. “ 엄마, 나중에~ 지금 말구요" 아무리 그게 자식에 대한 염려이고 넘치는 사랑이라지만 차마 그럴수는 없었다. 열자식이 한 부모를 못 섬긴다는 말이 우리를 두고 이름인데 '숫자일지언정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힘' 이라던 통장 아니었던가. 자식들이란 이름으로 마지막 남은 '힘' 까지 탈탈 털어내가는 털이범이 되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그게 내리사랑이라 불릴지라도 말이다.
12월 3일. 그날따라 날씨는 올 해 들어 가장 극심한 한파(寒波)가 기승을 부리던 때로 눈보라에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맹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입소하던 날 아침에 엄마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로부터 큰 절을 받았다. 엄마는 손주에게 미리 주는 세뱃돈이라며 빳빳한 새돈 한 묶음을 쥐어 주셨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를 앉혀두고 “니들이 참 애썼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나 힘들었냐. 내가 일부러 시집살이를 시킬려고는 안했다만 시어머니랑 살면서 남들처럼 자유롭지 못하고 살았으니 그게 바로 시집살이 한거지. 그동안 행복했다. 내가 다 어떻게 다 갚아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들도 며느리도 아무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눈물을 애써 삼키는 소리만이 큰 메아리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엄마 손을 잡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피곤할텐데 눈 좀 붙여” 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엄마는 “괜챦다”며 창 밖을 보고 계셨다. 새벽에 내린 눈으로 길은 미끄러웠고 시나브로 눈이 흩뿌리고 있었다.
가능하면 빨리 그 방을 빠져나오고만 싶었다. 얼굴이 나도 모르게 화끈 거렸다. 언젠가부터 누구랄 것 없이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엄마와 연관되어서 조금씩 회자(膾炙)되기 시작했을때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 가족과 더불어 언제까지나 오손도손 지내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야 빨리 현실을 직시해서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며 사안이 민감한 만큼 가장 오해의 소지가 없는 입장에서 진행해야 할 일이어서 그 역할을 자청해서 내가 맡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시는 입장에서 더는 못 모시겠다'는 말을 한것도 아닌데 멀리사는 딸이 너무 앞서 나가는 것 아니냐는 핀잔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요양원을 가는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요양원인지가 관건(關鍵)이었고 '어디서 사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차를 밟던 그날 아침 하필 하고 많은 노래중에 '꽃구경'이라는 노랫말은 왜 자꾸만 맴돌던지.....어느 봄날 꽃구경 가자며 노쇠한 어미를 지게에 태우고 나가 멀리 내다버리고 오는 아들의 심정이 구절구절 내게 오버랩(overlap) 되고 있었다.
요양원' 이란 단어를 언급하는것 만으로도 불효라며 거부감을 보이던 입장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침묵속에 숨고 나아가 입소 싯점이 지연되면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게 읽혀지기 까지 했을땐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치매가 찾아온다면 그것 만큼은 집에서 모시기 힘든 일이니 그것만큼은 이해해주고 용서해줘야 한다고, 치매만 아니라면 집이 아닌 밖에서 엄마를 모실 일은 없을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막상 닥치고보니 집에서 모시기 힘든 가늠해보지 못했던 숨은 복병(伏兵)들이 적쟎이 있음을 그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다.
80대 중반을 넘기면서도 인지력이나 기억력 그리고 판단력이 조금도도 녹슬지 않았지만 몸의 대칭 및 균형이 흐트러지고 양 옆에서 부축을 받지 않으면 보행이 힘들어지다보니 일상생활 모든것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혼자서 해온 목욕은 물론이고 화장실에서 옷 추스리는 일 조차 어려워지고 있는 싯점에서 제일 큰 염려는 낙상(落傷) 이었다. 그렇쟎아도 경미한 낙상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던데다가 데이케어 센터를 다니는 일도 점차 어려워져 보이는 상황에 예상보다 빨리 온 입소는 다행스러웠지만 막상 그 날짜에 닥치고보니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입에 단내가 나도록 아파트에 덩그마니 혼자 고립된 섬처럼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노인의 고독과 우울감을 피하는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다고 스스로 되뇌였음에도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고 "이제 가족분들은 그만 가셔도 좋습니다" 라는 말에 엄마의 시선을 뒤로 하고 그 곳을 나서면서는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는지, 돌아가신 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참으로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심정이 되었다.
그곳을 나온 우리는 "점심 때이니 밥이나 먹고 가자" 며 앉았지만 누구도 말이 없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어서, 누군가는 해야 해서 시작했고 대략 3년여 동안 나름 많은 곳들을 발품을 팔아서 심사숙고 하여 예까지 왔지만 정작 입소하는 날의 광경은 쨘하게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것 같아 피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질 못했다. '날 좀 빼주지 엄마는 왜 하필 내 손을 잡고 들어가고 싶다고 했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유아원에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고 나오는 아이의 엄마처럼 ‘행여, 울지는 않았을까? 집에 간다고 떼를 쓰지는 않았을까?’ 사뭇 불안했으며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것은 아니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멀리서라도 어떻게 하고 계신지 확인해보고 와야 할 것 같아 면회시간 한시간을 남겨두고 다급히 택시를 잡아 탔다.
동시에 주머니속의 전화기도 울렸다.
“엄마다. 니들이 엄마를 여기다 내쏴버리고 간것 같아 내 맘이 서글프다. 발도 시렵고.....”
<下편 계속>
안 들어가신다고 하시고 또 이곳은 홈케어를 받을수 있는 규정이 잘 되어 있어 내 어머님은 홈케어를 잘 받으셨지요.
미국이나 불란서의 양로원을 보며 이곳에서 늙어 노인이 되어가는 우리는 행운아임을 실감합니다. 애 많이 쓰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