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온니, 공주에서 여왕한다굽쇼?”(上) 대선주자 열전
by 차주범 | 12.09.05 22:44

이명박이 끈 떨어진 레임덕 신세로 대형사고(독도사태)나 치고, 국민들은 고단한 인생에 헉헉거리며 하루하루 사는게 전쟁인 판에, 태풍까지 밀려와 분위기 흉흉했던 바, 그 모든 사태와는 무관하게 대선을 향한 후보들의 진군은 꿋꿋하게 진행중이다.

내가 대통령의 깜냥이라고 거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푸른 기와집 세대주가 되려고 하는 인간들이 서로 잘났다고 난리들이다. 개인적으론 현재 거론되고 있는 유력 대선주자들이 한결같이 별로다.

가다다순으로 한 번 그들의 면모(面貌)를 파헤쳐 보자.

김두관 –너무 성급한 대선 출마-

‘이장에서 대통령까지’는 그의 정치적 목표를 집약한 그럴듯한 표현이다. 지방대 출신으로 졸업후 낙향해 정치운동을 하다 지자체의 하부 단위인 이장과 군수를 거쳐 노무현 정부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내고 민선 경남도지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런 이력 덕택에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기도 한다.

 

www.en.wilipedia.org 이하 사진

싹수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만약 그가 대통령에까지 선출된다면 또 한편의 드라마가 완성된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 너무 성급하게 대선에 출마했다. 그 자신의 경력이 대선출마 후보로 손색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의 생각이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는 고질적인 버릇이 있다.

김두관은 경남 도지사에 당선된 이후 이내 대선출마를 선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최소한 1~2회 정도의 임기를 채우면서 도지사로서 성과를 남겼으면 대선행보에도 유리할 뻔 했다. 결국 그는 지자체 경력으로 시작해 중앙정치의 최고 정점에까지 오르는 노정에서 가장 중요한 도지사 경력을 의미없는 반짝 정류장으로만 국한시켜 버렸다. 광역 지자체장을 대권행보의 도구로만 이용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한국은 아직 지방자치제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 덕분에 오로지 대권만을 추종하고 중앙정치에 모든 권한이 집중된 후진적 체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두관은 중앙정치의 강자로 광범위한 대중성도 미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자체의 총아(寵兒)로서의 지위도 포기하며 대선출마를 선언하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조용히 충남도지사의 역할에 충실한 안희정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제 퇴로는 자기 자신이 막아 버렸다. 지차체는 더 이상 김두관의 교두보가 될 수 없다.

이번에 대권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는 중앙정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여의도와 당내 정치 무대에서 권력투쟁을 하며 대권주자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힘든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경남도지사로서 차기 주자의 입지를 구축하는 경로를 포기한 그가 앞으로 유력 대권주자로 계속 살아남을지 주목된다.

“김두관 옵바, 옵바는 여의도 스타일이 아니야. 경남 스타일로 나갔어야죠.”

문재인 – 어설픈 이미지 정치의 실험-

문재인은 노빠 3인방(유시민, 문재인, 김두관) 중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던 유시민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온 정체 불명의 대권주자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친구로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을 관장했다. 이게 경력의 전부다. 그의 이력에선 능력을 검증할 만한 뚜렷한 정치활동이나 경험이 부실하다.

 

문재인의 최대 자산은 노무현의 후광(後光)이다. 동시에 최대 약점은 노무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무현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에겐 노무현이 가졌던 드라마가 없다. 바보소리를 들어가며 부산에서 끈질기게 출마하고, 인권변호사에다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이 구축한 인생역정에 비하면 문재인의 그것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힐링캠프에 출연해 손까지 삐어가며 벽돌깨기 한번 했다고 단기간에 문재인이 감동주는 사나이로 자리매김하긴 힘들다.

사람들은 문재인에게서 노무현의 향기를 맡고자 한다. 하지만 문재인은 그저 문재인일 뿐이다. 지금 문재인이 연출하는 노무현 코스프레는 ‘노짱’을 추억하는 사람들의 회상취미에나 복무할 뿐 본선에서 실질적인 표로 연결되기엔 함량히 한참 부족하다. 투표하는 일반 대중의 기대심리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에 기반한다. 이 대목에서 문재인에게선 어떠한 미래전망도 읽히지 않는다.

문재인이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할 절호의 기회가 지난 총선이었으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른바 낙동강 벨트에서 기대한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고 새누리당은 새파란 어린애를 상대후보로 붙여 김빼기를 해 버렸다. 문재인에겐 이겨도 본전이고 지면 쪽팔린 선거였다.

문재인은 대중들에게 실질이 아닌 두 가지 이미지로만 각인되어 있다. 노무현과 운명을 함께하며 획득한 ‘의리의 사나이 돌쇠’ 이미지와 간지나는 특전사 시절 사진이 풍기는 아우라다. 특전사 나온 의리있는 사나이가 행정부의 수반으로 능력을 발휘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미지의 허상이 걷히는 순간이 문재인의 진짜 면모가 드러나는 시점이다. 이미지의 유통기한은 이번 대선까지다. 이미지로만 평생 먹고살 수는 없다. 이미지는 한번 소비되면 식상함을 불러온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도 미래가 불투명한 정치인이다. 문재인이 민주통합당에서 대권 선두주자인 사실은 이 야당의 허약성을 그대로 증명한다.

“문재인 옵바, 옵바는 그냥 노무현 재단 이사장으로만 남았어야지, 너무 무리하시는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박근혜 –대한민국, 다시 시험대에 오르다-

한 가지 형상을 놓고 말하는 입장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묘사가 가능하다. 박근혜의 경우가 극적인 예다. 박근혜는 과묵하다고 평가받는다. 사실은 머리가 비어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없으니 할 말이 없을 뿐이다. 그러니 이 수첩공주는 중요한 현안에 직면했을 때 하품나는 원론 수준 이상의 의견을 제출하지 못한다.

 

박근혜는 진중하다고도 한다. 사실은 무책임한 것이다. 박근혜는 여당내 야당행세를 하며 집권여당의 정치적 책임에서 거리를 두어 왔다. 이 잔대가리 야바위는 제법 효과를 발휘해 사람들은 이명박의 실정과 박근혜의 정치는 완전히 무관한 두 개의 독립사안으로 착각한다. 그 결과가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성공이다. 보수언론의 일방적 감싸기하에 박근혜는 야당은 당연히 아니면서 그렇다고 집권여당도 아닌 가상의 제 3지대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정치의 골때리는 풍경중 하나다.

현재 아젠다 설정에서 박근혜는 가장 앞서있다. 역설적이게도 기득권 세력의 대변자인 새누리당의 대선 주자이면서 복지담론을 선점해 주도해 나가고 있다. 심지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주물럭거리다 의미를 퇴색시켜 한물간 개념인줄 알았던 ‘개혁’이란 구호에까지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다른건 몰라도 괴력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박근혜의 정치력은 관전자를 놀라게한다. 박근혜는 시덥잖은 야당후보는 한방에 보낼 능력이 있는 강펀치의 소유자임은 분명하다.

박근혜의 당선은 이명박의 당선과 연장선에 있다. 둘은 권력투쟁의 장에서 정적일 뿐 정치적 기반은 일치한다. 한국 보수의 양대 종류인 계급 보수와 이념 보수, 즉 돈과 북한으로 정리되는 문제에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입장을 가진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박근혜가 아무리 이명박 정권과 차별성을 부각하며 복지와 개혁을 부르짖어도 그것은 대선용에 불과하다. 박근혜가 집권후에도 공약내용과 똑같은 기조로 국정을 이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순진하다 못해 헛된 기대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4년 전에도 헛된 기대를 품었었다. 그 결과는 충분히 잔인했다. 시장 아줌마까지 광고에 동원하는 이명박의 서민사랑 제스처에 깜박 속은 결과 이명박의 집권 내내 혈압만 상승했다. 이명박에게 국민들은 속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명박이 도덕적으론 부족한 인간이라도 혹시 내 밥그릇은 잘 채워주지 않을까 하는 심리에 따른 지지가 이명박 당선의 비밀이다.

이번에도 한국의 유권자들은 박근혜가 혹시 찬란한 복지공약대로 내 삶을 보살펴주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할 것이다. 대중들은 대체로 공공의 이익보단 개인의 욕망을 투영한 투표를 하기 마련이다. 박근혜가 이명박처럼 유력 대권후보가 되면서 대한민국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의 유권자들이 과연 이명박을 용인한 것처럼 박근혜를 자기 대통령으로 승인할 것인가.

박근혜 대세론은 아직까진 여론조사 샘플로만 확인된 팩트다. 정말 대세가 형성되었는지는 뚜껑을 따봐야 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선거승리의 공식은 단 한가지다. 나의 지지층을 최대한 결집하고 부동층을 최대한 공략해야 한다. 부동층은 좋게 말해 중립성향의 유권자들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정치적 판단에 있어 아무 생각없이 사는 인간들이다.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새누리당을 찍을 사람과 죽어도 새누리당은 찍지 않을 사람이 각각 30% 안팎의 세력을 양분한다. 나머지 30~40%의 부동층를 최대한 내쪽으로 끌어오는 확장성이 승리의 관건(關鍵)이다. 이미 단단한 지지세력을 확보한 박근혜는 현재 부동층 공략에 선정적으로 나서고 있다. 전태일 기념사업회 방문과 홍대앞에서 젊은이들과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선거전략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박근혜가 기존의 보수후보들에 비해 덜 느물거리는 스타일이란 점에서 이런 노력들은 효과를 발휘할 공산이 크다.

박근혜를 공격하는 이른바 진보언론과 야당의 행태는 너무 찌질해서 한심할 정도다. 박근혜를 씹는 논리의 근저는 대개 박근혜의 출신배경과 과거에 머물러 있다.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박근혜가 군사독재의 계승자라는 논리전개는 왠만한 사고체계를 갖춘 중학생도 설득하기 힘든 개삼류 수작이다.

박정희는 박정희고 박근혜는 박근혜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무시하고 애써 자의적으로 3공화국과 박근혜를 연결하는 시도는 아직도 야당이 상대를 공격해 반사적 이익을 챙기려는 전략에만 안주하는 몹시 안일하고 띨띨한 자세다. 박근혜는 미래를 가리키며 본인을 브랜딩하는데 적들은 자꾸 과거만 가리키며 지들끼리 신난다고 박근혜를 조지면 유권자들은 금방 피로감을 느낀다.

지난 총선에서 이명박 정권의 실정만 디립다 공격하다 야당은 낭패를 보았다. 정수장학회 사건과 박근혜를 연결해 흠집내는 작전도 별무소용이다. 지난 대선에서 BBK 스캔들은 이명박의 당선에 아무런 영향을 끼지지 못했다. 이제 더이상 한국 유권자들은 정치적 도의나 출신 배경을 기준으로 투표하지 않는다. 누가 나와 내 새끼를 5년 동안 편안하게 먹여 살릴지가 최고 관심사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전망과 능력을 우선으로 본다는 뜻이다. 야권이 박근혜의 복지, 개혁 아젠다를 뛰어넘는 미래전망을 국민들에게 제시하지 못하면 이번 대선도 필패다.

“박근혜 온니, 청와대의 추억이 그리도 그립던가요? 일생을 공주로 살았으면 됐지 뭘 또 여왕까지 되려고 하십니까. 간단치 않은 인생을 산 당신, 나라를 위해서나 본인을 위해서나 이제 평민의 삶도 좀 즐기세요. 평민의 삶도 나름 괜찮아요, 공주님.”

손학규 – ‘학삐리’ 운동가 출신의 좌충우돌 대권 도전기-

손학규는 자질은 그럭저럭 괜찮으나 정치행보의 선택을 갈지자로 하는 바람에 배려버린 케이스다. 손학규는 구한나라당(새누리당)에 계속 남아있어야 했다. 그래서 김문수나 이재오처럼 그 안에서 승부를 봤어야 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민주당 계열에서 정치적 첫 걸음을 내딛었어야 했다. 민청학련 계열로 김근태처럼 자기세력을 형성할 조건도 충분했다. 김대중 보단 김영삼에게 더 끌렸던 인정과 고단한 야당 대신 편안한 여당에서 정치적으로 출세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경기도지사까지가 손학규 정치인생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한나라당 대선후보에서 나가리 되고 탈당해 민주당쪽으로 말을 갈아탄건 최대의 승부수였다. 현재까지 그의 승부수는 제대로 약발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동영에 패해 대선후보가 되는데 실패했고 이후 당대표가 되어 이끈 18대 총선에서 본인도 종로에서 낙선하고 민주당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후 스스로 귀양살이를 자처해 춘천에 처박혀 있다가 분당 보궐선거를 계기로 생환했다. 하지만 이번 총선을 방기해 국민적 관심을 완전히 획득하진 못했다.

손학규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철새’를 들먹인다. 본인의 출세를 위해 당적을 옮겼다는 말씀이다. 이런 비판은 형평성이 결여되어 있다. 역시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시작해 민주당으로 옮긴 김부겸, 김영춘 같은 이들은 잘한 선택으로 칭찬받는다. 철새들 중엔 이인제처럼 재수없는 종류도 있지만 손학규가 그런 쓰레기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같은 행위를 놓고 김부겸 등과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민주화 운동가이자 진보 정치학자로서 신망받던 그가 보수 정당인 구신한국당(한나라와 새누리의 전신)에 입당했던 ‘원죄(原罪)’ 때문이다.

손학규의 경우는 당적을 옮겼다는 사실보다는 그의 가치관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 손학규는 원래 진보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70년대 민주화 운동, 80년대 사회운동에 복무했던 전력이 있다. 그랬던 그가 구민자당(신한국, 한나라, 새누리의 전신, 아무튼 이것들은 부정을 저질러 욕을 바가지로 먹을 때마다 간판을 바꿔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에 입당했다는 의미는 본인의 정치적 신념과 사회변혁에 대한 관점을 180도 바꿨다는 의미다.

손학규는 구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의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진보에서 보수로 바뀐 변화에 걸맞는 행보를 보였다.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지역경제 개발에 매진하는 도지사의 이미지를 심기위해 노력했고 전국 최초로 영어마을(훌륭한 모국어를 가진 나라에서 이 무슨 황당한 짓꺼리냐)까지 조성하는 정성을 보였다. 즉 한국 기득권 세력의 기본철학인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개발논리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는 말이다.

이랬던 손학규는 민주당으로 옮긴후 춘천 칩거(蟄居)를 끝내고는 “공동체 주의와 보편적 복지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복지사회”를 건설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변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출신배경을 보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온 셈이다. 그러나 이런 손학규의 변화에선 그닥 진정성이 느켜지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속한 정당과 지지자들의 성향에 맞추어 그때그때 본인의 정강정책을 끼워맞춘 냄새가 난다.

이런 관계로 현재 손학규 캠프의 슬로건인 “저녁이 있는 삶”도 별로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슬로건은 사회 양극화, 복지제도 추락의 위기에 처한 한국사회의 선거운동 구호로는 나무랄데가 없다. 그러나 행동주체인 손학규가 좌충우돌의 정치행보를 보인 이유로 이 좋은 구호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손학규는 서울대시절 고 조영래 변호사, 고 김근태씨와 문리대 3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의 맹주로 활약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진 동지적 관계로 재야 운동권과 정치권에서 활약했으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손학규는 신한국당에 입당해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왔으나 조영래 변호사는 90년대 벽두에 운명을 달리했고 김근태 전의원도 얼마전 세상을 등졌다.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은 손학규는 나이(65세)로 볼 때 생애 마지막 대권도전이 될 이번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김근태 전의원도 대권도전의 길목에서 쓸쓸히 퇴장한 바 있다.

“손학규 옵바, 옵바는 자질면에선 딴 인간들에 비해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정치인은 행동으로 평가받고 책임지는 존재이지요. 그간의 정치행보가 끝내 그대의 발목을 잡게될 듯 하네요. 그러게 한 길만 걸었어야죠.”

<下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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